조선의 시인1, 정 도 전 (鄭 道 傳)
題咸營松樹(제함영송수) / 정도전(鄭道傳)
蒼茫歲月一株松 (창망세월일주송)
生長靑山幾萬重 (쌩장청산기만증)
好在他年相見否 (호재타년상견부)
人間俯仰便陳蹤 (인간부양변진증)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청산에서 자람은 어찌 만 배나 중하지 않으랴만.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
정도전은 경상도 영주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하고 명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다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정도전은 고려의 혁명을 위해 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가서 천명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자고 요청한다.
정도전은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주장하며 우왕 창왕을 폐위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공양왕마저 폐위하고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옹립했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어 체제와 관제를 정비했다.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국교로 삼아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여 태평성대를 추구했다.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건축하여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정도전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적장자도 아니고 공을 세운 왕자도 아니고 단지 이성계가 총애하는 여덟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정도전은 한고조 유방과 장량 그리고 당태종 이세민과 위징처럼 태조 이성계의 정도전을 비유했다. 이방원이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고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조선의 첫 번째 세자로 책봉된 의안대군 이방석과 정도전이 살해됐다.
조선의 시인2, 김 종 직 (金 宗 直)
寶泉灘卽事(보천탄에서) / 김종직(金宗直)
桃花浪高幾尺許 (도화랑고기척허)
狠石沒頂不知處 (한석몰정부지처)
兩兩鸕鶿失舊磯 (양냥노자실구기)
啣魚却入菰蒲去 (함어각입고포거)
복사꽃 뜬 냇물 얼마나 불었는고,
솟은 바위 아주 묻혀 짐작 어려워.
쌍쌍의 가마우지 옛 터전 잃어
물고기 입에 문 채 풀섶에 드네.
냇물은 역사를 뜻하고 솟은 바위를 사람을 뜻하며 평화로운 시대에 솟아있던 바위가 역동의 역사 속에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시대적 상황에 터전을 잃은 가마우지가 인고의 삶을 통해 생명을 이어간다는 뜻이다.
보천탄은 해평현(海平縣)에 있는 낙동강 지류로 조세로 받은 곡식을 이송하는 조창이 설치된 나루터로 교통 요충지였다. 보천탄은 복사꽃 필 무렵에 물살이 거세며 가마우지는 배가 들어오는 곳에 서식한다.
김종직은 경상도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며 유학의 도통을 계승한 김숙자의 아들이다. 김숙자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인 야은 길재에게 수학했고, 아들이자 문하생인 김종직을 통해 정몽주의 학통을 김굉필, 조광조로 전수했다.
김종직은 과거에 합격하여 도학적 실천을 구현하려는 군자임을 내세우며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세조의 단종에 대한 폐위를 비판하고 풍자하는 조의제문(弔義帝文)을 남겼다. 대제학을 끝으로 낙향하여 사망했다.
연산군 때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조의제문을 사초에 옮겨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됐고, 김일손 권오복 등은 사사됐고, 정여창, 김굉필 등은 유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