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독립운동가 1) 봉오동전투 홍범도
홍범도(洪範圖)는 홍경래의 친족으로 증조부 홍이팔은 처형됐고 가문은 멸족이 되었다. 할아버지 홍동철이 구사일생으로 평양으로 은신하여 살아났다. 어머니는 홍범도를 낳고 사망했고 아버지는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홍범도는 머슴살이를 하다가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군인이 되었다. 22세에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를 하였으나 비구니 단양이씨와 열애 끝에 환속하고 북청에서 사냥꾼이 되었다.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에 참여했다.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자 저항했다. 홍범도의 부인 단양이씨는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했고 아들 홍양순은 일제와 싸우다 전사했다. 홍범도는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계속했다.
홍범도는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백두산 일대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사령관이 되어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습격했다. 대한독립군을 대한북로독군부로 개편했다.
1920년 6월 홍범도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했다. 일본군 정규군 157명의 사망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독립군은 4명이 전사했다.
1920년 10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연합하여 10여 회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대파했다. 일본군 정규군 1,200여 명을 사망했고 독립군은 100여 명이 전사했다. 청산리전투는 독립군이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만 명의 조선인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홍범도는 러시아 자유시(自由市)를 새로운 근거지로 옮겼으나 자유시참변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37년 스탈린이 일본인 및 일본군 간첩을 차단한다는 차원에서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 홍범도는 고려극장의 관리인으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홍범도는 1962년 박정희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2021년 8월 15일 대한민국으로 유해가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홍범도는 이념논쟁의 희생양이 되어 육사에서 흉상이 철거된다.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2) 의열단 김원봉
김원봉(金元鳳)은 경남 밀양에서 김주익과 이경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동복동생을 낳다가 사망했다. 밀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화중학교 교장이자 독립운동가인 전홍표(全鴻杓)의 영향으로 항일사상을 갖게 되었다.
김원봉의 할아버지 김철화는 역관 출신이고 아버지 김주익은 중농 출신이다. 김원봉의 계모는 8남 2녀를 낳았고 서모는 3남을 낳았고 고모는 독립운동가 황상규에게 시집갔다. 의열단원 윤세주는 바로 옆집에서 살았고 평생을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김원봉은 일제에 의해 동화중학교가 폐교 당하자 표충사로 들어가 독학을 하며 독립운동의 꿈을 키웠다. 경성 중앙중학교로 편입하여 김성수 안재홍 등 스승을 만났고 윤치영 변영로 김약수 등과 교류했다.
김원봉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했다. 3.1운동이 실패하자 프랑스 조계지인 상하이에서 일본의 침략 본거지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고 윤세주, 이성우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여 7가살(可殺) 5파괴(破壞)를 행동 목표로 투쟁했다.
7가살(可殺)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수뇌,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 토호열 등이고 5파괴(破壞)는 조선총독부, 동양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문사, 각 경찰서, 기타 일제 주요 기관 등이다.
의열단원인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파, 김상익의 조선총독부 폭파,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습격, 김지섭의 도쿄황궁 파괴, 나석주의 동양척식 주식회사 파괴, 박광희의 밀정 배정자 암살 시도 등 의열활동을 전개했다.
김원봉은 의열투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황푸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부사령관에 임명됐다.
김원봉은 첫 번째 부인 최씨가 요절하자 박차정과 재혼했다. 박차정은 근우회 사건으로 투옥됐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일본군과 전투에서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34세에 요절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김원봉은 해방이 되자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을 지지했고 여운형이 암살되자 김구의 남북협상을 지지했다. 김원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평양에 갔다가 백색테러 위험을 이유로 북한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김원봉은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나 숙청됐다. 월북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버지 김주익은 외딴 곳에 유폐되어 굶어 죽었고 이복동생들은 처형됐다. 김원봉은 남북한 모두로부터 한동안 버림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