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독립운동가3.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은 김알렉산드라라 부르며 19세기 후반 대흉년으로 연해주로 이주한 김두서의 딸로 1885년 연해주 시넬니코보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이 되었다.
김알렉산드라의 아버지 김두서는 표트르 세묘노비치로 개명했고 러시아와 청나라를 연결하는 동청철도 공사 통역관으로 만주로 차출되어 급사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친구인 스탄케비치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양아버지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술과 도박에 찌든 남편과 이혼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한국계 중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인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김알렉산드라는 극동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김립 이동휘와 함께 한국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이자 '반일(反日), 반제(日帝)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령으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대항했다.
한인사회당은 출판사를 설립하여 한국의 역사 지리 등 교과서를 간행했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하자 조선인 적위대를 구성해 반일 항쟁에 돌입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1918년 9월 16일 '죽음의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김알렉산드라는 "내 눈을 천으로 가리지 마라. 나는 죽음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다" 라던 독립운동가의 죽음은 여전히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버림받은 독립운동가4. 조선혁명선언의 신채호
신채호(申采浩)는 충청도 대덕에서 출생하여 8세에 아버지 신광식을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族鄕)인 충청도 청원으로 옮겼다. 어려서 할아버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며 신동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신채호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됐다. 황성신문에 이어 대한매일신보로 옮겨 월남망국사 이태리건국삼걸전 등을 출판했다 안창호가 주도하는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했다.
신채호는 국권피탈이 확실시 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1919년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 라고 규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독립운동의 외교우선론에 따라 신채호 등 창조파와 안창호 등 개조파가 대립했다. 신채호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상하이에서 의열단의 김원봉의 요청으로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했다 .
신채호는 1929년 5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감옥에 수감됐다. 1936년 2월 "내가 죽거든 왜놈들 발에 시체가 채지 않게 화장해서 재를 바다에 뿌려 달라" 라고 유언을 남기고 57세의 나이로 옥사했다.
신채호의 아들 신수범은 17세에 영양실조로, 부인 박자혜는 49세에 병으로 사망했다. 1962년 박정희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2009년 "왜놈이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스스로 무국적자가 된 지 97년 만에 국적을 회복했다.
신채호가 1931년 단군부터 삼한까지 역사를 기록한 '조선상고사'에 "역사란 무엇인가?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 발전하고 공간으로 확대되는 심적(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다" 라고 기술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말은 아직까지 누구의 말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신채호가 1908년 대한매일신보사에 연재한 '독사신론(讀史新論)'에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클 수 없다' 라는 기록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