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은 전라도 해남 출신으로 김안국과 최산두의 문인이다. 아버지 유계린(柳桂鱗)은 순천으로 유배온 김굉필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로, 벼슬을 하지 않고 해남에서 독서만 하였다.
외할아버지 금남 최부(崔溥, 1454~1504)는 나주 출신으로 조선의 3대 기행문인 ‘표해록’을 남겼고 갑자사화로 처형된 호남의 대표적 사림이었다. 부인 송덕봉(宋德奉)은 담양 출신의 여류시인으로 유배 중인 남편을 찾아 함경도 종성까지 가서 고락을 함께 하였다.
유희춘은 25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세자 인종과 임금 명종을 가르쳤고 33세에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해남으로 귀향했다. 34세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고 고향인 해남에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로 이배됐다. 문정왕후가 죽자 충청도 은진으로 다시 이배됐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석방되었다.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함경도에서 20년 동안 유배생활
을사사화는 윤원형 등 소윤(小尹) 일파가 윤임 등 대윤(大尹) 일파를 축출하고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양재역 벽서사건은 권력을 잡은 윤원형이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벽서를 과천 양재역에 나붙은 사건인데, 이 사건으로 이언적, 노수신, 유희춘 등이 유배되었다.
유희춘은 함경도 종성에서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이황과 서신을 교환하고 주자학을 토론하며 저술에 몰두했다. 또한 유배 중에 만 권의 책을 모두 읽고 후당(後唐)의 이한(李瀚)이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저술한 역사서 ‘몽구(蒙求)’에 빠진 부분을 추가하여 주석을 붙여 ‘속몽구(續蒙求)’를 편찬했다.
유희춘이 54세에 명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유배생활 20년 만에 해배됐다. 선조는 조선 최초로 방계승통인 임금이 되었으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 식견이 매우 좁았다.
= 유희춘은 선조에게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며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많았다”라고 하였다고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 기록했다.
유희춘은 부제학, 대사성, 대사간, 대사헌, 전라도관찰사, 예조참판, 공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62세에 정2품 자헌대부에서 사직하고 처가인 담양으로 낙향하여 연계정에서 하서 김인후, 면앙정 송순, 제봉 고경명 등과 교우했다. 후학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미암일기를 남기고 사망했다.
‘미암일기’는 유희춘의 친필일기로 조선 중기의 사회상을 세밀하게 기록한 귀중한 자료인데, 조선시대에 씌여진 개인일기 중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1567년 10월 선조 즉위년 충청도 은진으로 이배되어 쓰기 시작하여 1577년 5월 전라도 담양에서 사망하기 이틀 전까지 11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록했다고 한다.
장장 10년간 개인의 대기록 ‘미암일기’
일기에는 국가의 정치, 궁궐의 생활, 사회의 풍속, 개인의 일상 등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승정원일기가 소실되어 선조실록 편찬에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미암일기 및 미암집목판은 1963년 보물 제260호로 지정됐다.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는 미암 종택과 미암 박물관을 비롯해 후학을 양성한 ‘연계정’, 미암일기를 보관한 ‘모현관’ 등이 있다. 담양읍 향교리의 의암서원에 유희춘이 배향됐고 대덕면 비차리에 유희춘 신도비가 남아있다. 미암 유희춘은 하서 김인후(金麟厚), 고봉 기대승(奇大升), 일재 이항(李恒), 죽천 박광전(朴光前)과 더불어 호남 5현(湖南五賢)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