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살다간 ‘에바 페론’, Don't Cry For Me Argentina

2024.01.11 21:30:38

   1952년 7월 26일 아르헨티나의 한 영화관 집중하며 영화를 보던 순간 갑자기 스크린이 꺼진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관객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소리 지르며 항의하기 시작한다.

 

이때 극장 관계자가 앞으로 나와 놀라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방금 전 8시 23분경에 우리의 정신적 지도자 ‘에바 페론’ 여사께서 서거하셨다는 비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불과 3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아르헨티나 대다수의 대중은 그녀의 죽음을 가슴 깊이 애도했다.

 

한 달간의 장례식은 국민들이 바치는 꽃으로 가득했다. 빈민층의 딸로 태어나 온갖 역경을 딛고 퍼스트레이디가 된 그녀의 인생은 한 편의 영화와도 같다. 너무도 짧고 극적인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에바 페론’의 이야기이다.

 

 

1919년 5월 7일 아르헨티나, 드넓은 초원 지대인 팜파스에 속한 작은 마을 로스톨도스에서 그녀가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농장 주인 후안 두아르테의 첩이었다. 아버지 두아르테는 그녀를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에바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 불행의 연속이었다.

 

에바는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떠나고 싶어 했다. 대중 잡지를 읽으며 대도시의 화려한 배우가 되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가진 것이 없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이용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가수인 오거스틴 마갈디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데려가 달라고 그에게 애원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도시로 왔지만 마갈디는 그녀를 챙겨주지 않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에게 도시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삼류극단, 술집, 영화사 등을 전전하며 생활을 이어갔고, 여러 남자의 품을 전전하기도 했다. 힘든 생활에서도 그녀는 스스로를 꼬마 에바인 에비타라 부르며 용기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가리지 않는 노력 덕분인지 사진모델, 영화배우 등으로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가수, 사진작가, 투자자, 군인 등 여러 남자와 만나고 헤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녀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온 지 10년째인 1944년 그녀의 인생을 바꾸게 될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당대의 실력자이자 통일 장교단의 리더인 ‘후안 페론’, 부인을 잃고 혼자 지내던 후안 페론은 에바와 빠르게 사랑에 빠졌고 함께하게 된다. 얼마 뒤 '산후안'에서 6천 명 이상이 사망하는 대지진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후안 페론은 노동부장관이었다. 지진으로 인한 기금 마련에 앞장섰고, 에바 역시 함께 동행하며 후안 페론을 돕는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은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시련이 찾아온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에델미르 파레이' 장군이 쿠테타로 집권하고 있었다. 그에겐 확고한 지지 기반이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후안 페론은 눈엣가시였다. 노동자 위주의 사회 정책을 주장했고 또한 이재민 구호 활동을 통해 대중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17일 에바와 함께 지내던 후안 페론은 국민선동죄라는 웃지 못할 죄목으로 전격 체포되어 구금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에바는 뜻밖의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는 후안 페론의 석방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헌신했다. 

 

라디오에서 호소력 있는 간절한 연설을 했고 새로운 아르헨티나를 외치며 민중들의 총파업을 일으키기도 했다. 에바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팜파스의 가난한 딸, 불우한 출생, 힘들었던 인생사에 노동자들은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후안 페론을 향한 헌신적인 마음과 열성적인 연설, 아름다운 모습에 대중들은 열광했다. 총파업이 시작된 지 10일 뒤 후안 페론은 전격 석방되었다. 이 모든 것은 에바의 석방 운동 덕분이었고, 그녀의 헌신에 감사하듯 1945년 이 둘은 정식으로 혼인했다. 

 

1년 뒤 대통령 선거철이 다가왔다. 에바 페론과 후안 페론은 늘 함께했고,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확신에 찬 연설은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비타’라는 애칭이 전 국민에게 알려진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후안 페론은 부인의 인기에 힘입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농로에서 호스티스로, 호스티스에서 배우, 성우 그리고 영부인이 되기까지 그녀의 인생 역정은 '막달라 마리아'에 비견되며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탁월한 미모, 호소력 짙은 연설과 선동능력, 언제나 노동자와 농민의 편에 서는 진솔한 모습까지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심장이었다. 

 

[저 페론과 에바 페론은 오랫동안 알고 있었습니다. 이 국민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국민이 페론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후안 페론은 연설문 중)

 

에바 페론은 영부인으로서 보낸 9년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았다. 혼자만의 능력으로 여러 나라를 돌며 재정지원을 얻어냈고, 아르헨티나 전역를 다니며 복지 사업과 봉사 활동을 벌였다. 

 

 

에바는 자신이 과거에 힘들 생활을 겪었기에 가난한 이들의 삶과 그들의 고통에 가정 먼저 눈을 돌렸다. 노동자와 하층민에게 후한 정책을 펼쳤고, 자선사업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특히 여성의 투표권, 여성 균분상속, 첩의 자녀에게도 같은 권리를 갖게 하는 정책을 추진하며 자신의 과거를 잊지 않았다. 

 

그렇게 에비타는 민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고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1952년 7월 26일 에비타는 34살의 나이로 척수백혈병과 자궁암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한 후안 페론과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 때문에 에바 페론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었다. 

 

 

그 후 후안 페론의 망명으로 시신이 이탈리아로 숨겨지기도 했고, 나중에 다시 옮겨져 24년 만에 가족 묘역으로 옮겨졌다. 죽어서도 파란만장한 수난을 겪게 되었다. 흔히 페론주의로 알려진 페론 부부의 포퓰리즘 정책은 그간 경기침체의 근본적인 책임이다. 혹은 빈부격차의 경제구조를 그나마 정상화했다는 정반대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빈민들의 성녀이자 구원자 또는 나라 경제를 망친 대중영합주의자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도 아르헨티나에서는 그녀를 그리워하고 성녀로 추앙하고 있다. 그녀의 묘비명은‘Don't Cry For Me Argentina(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이며, 아마도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전설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정치나 정책과는 별개로 자연인으로서 느껴지는 그 삶의 치열함,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던 열정,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는 마음에 감동하게 되고 그 점을 높이 사게 된다.

 

오늘은 영화 에비타에서 '마돈나'가 불렀던 주제가 ‘Don't Cry For Me Argentina를 들어야겠다.

 

 

박형수 기자 daeshin23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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