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요) 서경별곡과 쌍화점
고려가요3. 서경별곡
서경별곡 / 작가 미상
서경이 서울이지마는 새로 닦은 서경을 사랑하지마는
여의기 보다는 여의기보다는 길쌈베 버리고서리도
사랑해 준다면 사랑해 준다면 울면서 쫓겠나이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서경별곡은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는 여인의 슬픈 심정을 읆은 고려가요이다. 지금의 평양인 서경에서 불린 노래이다. 악장가사(樂章歌詞)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수록되어 전한다.
조선 성조실록에 '서경별곡 같은 작품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종묘악(宗廟樂)으로 불가(不可)하다'고 기록됐다. 후렴구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는 북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로 음악의 효과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단락은 님이 떠나신다면 베도 버리고 따라가겠다고 한다. 둘째 단락은 구술의 끈처럼 천년을 홀로 지낸다 해도 믿음은 버리지 않겠다고 한다. 세째 단락은 님을 싣고 떠나가는 뱃사공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평양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으로 비정하며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성이 위치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황폐해진 평양을 부흥시키기 위해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했다. 고려 3대 정종이 서경으로 천도하려다가 실패했다.
고려 17대 인종 때 묘청과 정지상의 서경천도를 추진하다가 김부식에게 좌절됐다. 고려 31대 공민왕 때 신돈이 평양 천도를 주장했으나 실패했다. 조선시대에는 평안도의 감영이 위치했다. 평양은 북한에서 1948년 임시수도로, 1972년 정식수도로 지정했다.
고려가요4. 쌍화점
쌍화점 / 작가 미상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인 아비 내 손목을 쥐더이다
이 소문이 이 가게 밖에 나고들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같이 답답한 곳이 없다
작자 미상의 고려가요 쌍화점은 악장가사 등에 기록됐고, 시용향악보에는 한시로 개작한 쌍화곡으로 전한다. 고려사에는 충렬왕 때 '남장(男粧)에게 가르친 새로운 노래' 라고 기록됐다.
쌍화점은 퇴폐적이고 노골적인 성윤리를 노래한 가요이다. 여자를 유혹하여 불륜을 하는 남자와 소문을 들고 찾아가는 '회회 아비'는 위구르족, '삼장사의 주지'는 스님, '우물가의 용'은 왕족을 상징하며 불나방 같은 금기의 사랑을 표현했다.
고려 31대 공민왕은 27대 충숙왕과 공원왕후의 아들이며 28대 충혜왕의 동복동생이자 29대 총목왕과 30대 충정왕의 숙부이다. 즉위 초반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주국을 선언했다. 노국대장공주가 사망하자 개혁의지가 상실됐다.
노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고손녀이자 공민왕의 정비이다. 조국 원나라를 배신하고 남편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지원했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가 난산으로 사망하자 정치를 포기하고 신돈에게 권력을 양도했다.
신돈은 경상도 영산 출생의 승려이며 생불(生佛)을 자처했다. 환속하여 정1품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에 등용되어 개혁정치를 추진했다. 권문세족들이 역모를 꾀했다는 고변으로 목이 잘려 살해됐다.
반야는 신돈의 여종으로 공민왕의 애첩이 되어 아들 모니노(牟尼奴)를 낳았다. 모노니는 32대 우왕으로 즉위했고 우왕의 아들이 33대 창왕으로 즉위했다.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핏줄이라며 20대 신종의 7대손인 왕요를 34대 공양왕을 옹립했다. 공양왕을 마지막으로 고려는 멸망했다.
자제위(子弟衛)는 공민왕이 젊고 잘생긴 청년을 뽑아 국왕의 시중을 들게 한 기관이다. 자제위 소속 홍륜과 최만생이 동성애를 즐기다가 공민왕의 후궁인 익비(益妃)와 간통을 하였다. 홍륜과 최만생의 역쿠테타로 공민왕이 살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