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李珥)는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나서 경기도 파주에서 성장했다. 조광조를 사숙하고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9차례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린다.
이이는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아버지가 주모 출신인 권씨와 재혼하자 어머니 시묘살이를 마치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승려가 되었다가 1년 만에 환속했다. 한때 승려의 경험인 동인과 남인의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이는 서경덕, 이황, 조식, 이언적, 백인걸 등을 비난하여 동인의 비난을 들었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자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주장했다. 동인의 영수 김효원과 서인의 영수 심의겸을 동시에 탄핵하여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만 9번이나 임명됐고 대사헌, 대제학, 우찬성,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변법경장(變法更張)을 주장했다. 특히 병조판서로 재임하며 폐정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며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으로 서인 소속의 정여립이 스승에게 실망하고 동인으로 전향하여 선조의 눈 밖에 났다. 정여립이 대동계(大同契)를 이끌고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 정여립과 연루된 1,000여 명의 동인이 학살되는 기축옥사가 발생했다.
이이는 39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해주에서 12세 기생 유지(柳枝)를 만났다. 이이가 48세에 평양을 가던 중에 해주에서 다시 유지를 만났다. "문을 닫으면 인을 상할 것이요 동침을 한다면 의를 해칠 것이다" 라며 병풍으로 자리를 달리했다.
이이는 '만약 전생, 현생, 후생이 있단 말이 헛말이 아니거든 장차 죽어 부용지성에서 너를 만나리' 라고 유지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사망했다. 유지는 이이의 묘지에서 3년상을 치른 후 여승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이는 병을 얻어 관직을 사퇴하고 와병하다가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영의정에 추증됐다. 숙종 때 이이와 성혼이 문묘에 종사됐다 기사환국으로 출향됐고 갑술환국으로 서복향됐다.
이이는 이언적, 이황, 송시열, 박세채, 김집과 함께 문묘와 종묘에 동시 배향을 이룬 6현 중 하나이다. 이이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등을 남겼으며 5천원권, 신사임당은 5만원권 지폐 도안의 주인공으로 선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