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金長生)은 한성부에서 대사헌 김계휘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은 임진왜란 당시 실종됐고 차남 김집은 문묘와 종묘에 동시에 종사된 6현 중 하나이며 삼남 김반은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종조부이자 구문몽의 저자인 김만중의 조부이다.
김장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송익필(宋翼弼),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유학의 종장(宗匠)이요 예학(禮學)의 태두가 되었다. 김장생의 예학론은 노론 세력의 정치이념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김장생은 인조가 생부 정원군을 추존왕 추숭을 반대하여 갈등하게 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됐고 출사를 거부하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김육 등 후학을 양성했다. 숙종 때 문묘에 종사됐고 기사환국으로 문묘에서 출향됐고 갑술환국으로 종향됐다.
김집(金集)은 한성부에서 대사헌 김계휘의 손자이자 김장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송상현과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아버지 김장생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이었다. 산림의 천거로 대사헌에 임명됐으나 사임하고 경서 연구에 몰두했다.
김집은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북벌론을 제창했고 이조판서가 되어 대동법을 반대했다. 소현세자 복권을 주도하다가 관직을 사퇴했다. 김집은 송익필, 이이, 성혼의 학문을 계승하여 김장생의 예학(禮學)을 일으켜서 송시열, 송준길에 전해줬다.
김집은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하여 예학(禮學)을 체계화 하였다. 고종 때 영의정에 추증되고 유일하게 부자가 문묘에 종사됐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박세채와 함께 문묘와 종묘에 동시에 종사된 6현 중 하나이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황해도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