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년∼1715년)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화가로,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자이다. ‘자산어보’를 남긴 손암 정약전,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조선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부가 된다.
정재원(1730~1792,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의 아버지)의 둘째부인이 공재 윤두서의 손녀 윤소온이다. 태어나는 순간 당파가 정해지던 조선 후기에 태어났으니 윤두서 역시 당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해남 윤씨 가문은 대대로 동인과 남인에 속했다. 윤선도의 조부인 윤의중은 종2품 대사헌을, 생부인 윤유심은 종3품 예빈시부정을, 양부인 윤유기는 종2품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했다. 시인이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굽힘없이 표현했던 격정적 정치인, 고산 윤선도는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당쟁에 휘말려 20여 년 동안 유배생활을 전전한다.
남인(南人)에 속했던 고산 윤선도의 후손들 역시 정치적 좌절을 겪는다. 서인(西人)이 여당이던 시절이 많았으므로 윤두서의 조부인 윤인미, 양부 윤이석, 생부 윤이후, 친형 윤종서 윤흥서 윤창서 등도 고위 벼슬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친형 윤종서는 당시 정국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혹독한 매질로 사망한다.
일찍부터 시서화(詩書畵)에 능했고 진사시에 합격했던 공재 윤두서는 친형 윤종서의 죽음과 절친이었던 서산 이잠의 죽음을 목격하고 출사의 길을 포기한다. 윤이석의 양자로 들어가 해남윤씨 종손이 된 윤두서는 한양에서 살면서 이른바 근기 남인(近畿南人)들과 시서화를 교유하면서 살게 된다.
세간이 널리 알려져있듯 공재의 대표작은 ‘윤두서 자화상’(국보 제240호)이다. 머리 윗부분을 잘라내고, 귀와 목 몸체가 빠진 채 정면을 강력하게 응시하는 파격적 구도를 취했다. 가까운 이들의 좌절과 죽음을 겪으면서 새긴 감정이 절제된 채 표현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자화상의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공재는 ‘그림에 실학적 가치를 담은 선구적 화가’라는 평가가 더 적합하다. 당시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엄청난 서책을 보유했던 그의 집안에는 성리학 서적뿐만 아니라 천문, 지리, 의학, 병법, 회화, 수학 서적이 많았다.
공재는 시서화 중에서 회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재능을 발휘한다. 그의 그림에는 리얼리즘과 휴머니즘이 담겼다. 스스로 양반이었지만 세상의 아픔에 공감하는 톨레랑스가 깊었던 그는 노동하는 자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런 정신이 가장 잘 반영된 작품으로 <나물캐는 여인>이 꼽힌다.
휴머니즘과 함께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특징은 리얼리즘이다. ‘자화상’의 수염 묘사에서 보여지듯, 사물에 대한 그의 관찰은 치밀하고 날카로웠다. <유하 백마도> <선차도> <경답목우도> <노승도> 등이 그런 정신을 반영한 작품들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특기할 만한 분야는 지도이다. 시중에 유통되던 지도를 입수해 자신의 시각과 관찰력을 더해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국여지지도>와 <일본여도>라는 지도에 그의 실학자적 면모가 잘 나타난다.
올해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300주년이 된다. 1715년 겨울, 전남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공재는 4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조선 후기 실학의 태두로 불리는 성호 이익은 “이제 공께서 돌아가시니 친구를 사귀는 길이 외롭게 되었고, 그를 쫓아 미처 듣지 못했던 새 지식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제문에 썼다.
그의 화가적 역량은 큰아들 낙서 윤덕희(1685~1776), 손자 윤용(1708~1740)에게로 이어진다. 전남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에 있는 고산윤선도유물관에서 그의 작품들을 일별할 수 있고, 전남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 그의 고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