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宋時烈)은 충청도 옥천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며 노론의 영수이다.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했고,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세자 시절의 스승으로 송자(宋子)라는 존칭을 받았다. 아버지인 송갑조와 김장생, 김집 부자에게 수학했다.
송시열은 성리학의 대가이자, 송자(宋子)라고 존칭 받은 대학자(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정치인, 시인, 서예가, 교육자, 작가)로 당색은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학자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에 배향 되었고, 사후에는 신하로서의 최고 영예인 종묘에도 함께 종사 되었으니, 은진송씨는 6대 국반(國班) 중 하나이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직후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춘추대의에 근거하여 북벌을 위한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라는 주장으로 1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했고 2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했다.
송시열은 기사환국으로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어 제주도에 이배됐다.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사망했다.
그의 후손 중 손자 주석(疇錫)은 숙종9년 문과에 급제해서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고 저술에는 향동문답(香洞問答) 구화사실(構華事實) 북관곡(北關曲) 등이 있다. 경술국치에 반대하여 순종 황제에게 유언 상소를 올리고 자결한 독립운동가 겸 유학자 송병선은 송시열의 9대손이다.
박세채(朴世采)은 대사헌 박을복의 증손자이자 형조판서 박동량의 손자이며, 사헌부장령 박의의 아들이다. 박세당, 윤선거, 윤증, 송시열 등과 사돈지간이다.
그는 일찍이 이이를 사숙,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했으며 평생 이이를 존경하였다. 1638년(인조 16) 아버지 박의에게 글을 배우며 가학을 수학하다가 김집과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그 뒤 18세 때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성균관 유생 시절에 이이와 성혼의 문묘(文廟) 종사(從祀)와 추대를 주장,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박세채는 유직의 상소의 부당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이 남인 유생을 옹호하는 것이었으므로 이에 분개하였다. 그 뒤 허목 등 이이·성혼의 문묘 종사에 대하여 반대하는 세력들을 비판, 공격하다가 조선 효종의 꾸지람을 듣고서 성균관 수학 2년만에 과거를 단념하고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그 뒤 성균관을 나와 다시 청음 김상헌의 문하에 찾아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송시열, 송준길과도 학문 교류를 하였다. 그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으로 당쟁에 끼여들었으나 황 극 탕평설을 주장하면서 중립과 당쟁의 근절에 노력하였다. 그는 당대의 유종(儒宗)으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다.
박세채는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서인의 입장을 지지하여 1차 예송논쟁이 승리했고, 2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했다. 경기도 양평으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주자의 해설을 토대로 춘추보편(春秋補編)을 출간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박세채는 경신대출척으로 복권되어 소론의 영수가 되어 영의정을 역임했다. 이이와 성혼에 대한 문묘 종사에 기여했고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했다. 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김집과 함께 문묘와 종묘에 종사된 6현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