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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에서 선비의 길을 다시 생각한다.

   아직 찬바람이 일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른 봄이지만, 고색이 창연한 필암서원 확연루(廓然樓) 주위의 매화 고목등걸에서는 오랜 연륜을 자랑하듯, 듬성듬성 백매, 홍매(紅梅)가 북풍한설을 이겨낸 결기를 자랑하듯 피어나고 있다. 


매향(梅香)은 아득하여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미 심향(心香)으로 스며들어 그 고고함을 느끼게 한다. 청절당에서는 도포 입 은 선비들의 강독 소리가 상기도 청아하게 들리는 듯한데, 동재에서는 선비문화의 강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최근 장성군이 필암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2022년도부터 100억여 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필암서원 선비문화 세계화 사업추진'이라는 비전하에 '필암서원을 한국의 선비문화의 본향으로 삼아 세계화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문정공 하서 김인후(文正公 河西 金麟厚) 선생을 모신 필암서원과 묘소, 신도비, 통곡단, 어사리 등 하서와 관련된 모든 유무형의 유적을 재발굴 조명하고 디지털화하여 후세에 선비문화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감개무량하였다. 

 

하서 김인후는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학문적 소양을 갖춘 성군인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도학절의문장(道學節義文章)의 해동 제일인자라고 극찬하면서, 하서 사후 236년이나 지난 뒤에, 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배행(文廟配享)을 시키고, 1659년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는 사액을 내려 명부조한 큰 인물이다. 

 

조선의 국가 경영의 가장 근본 철학이었던 성리도학을 천명 도 등으로 심오하게 궁구하고, 불의에 저항하여 권력 실세에 야합하지 않는 충절의 정신이 오늘날 호남과 광주가 나라의 위기 때마다 의병과 시민의 저항으로 나타난 의향의 정신적 토대도 되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소쇄원 48영이나 면앙정 30영등 1600여 수의 시와 부를 짓고, 백련초해(百聯抄解), 자연가(自然歌)등을 우리말로 지어 국문학적 가치가 높으며, 정철 등 성산가단에도 큰 영향을 준 그것으로 학계에서 발표되고 있다. 

 

우리 필암서원의 입지조건은 다른 서원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다.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이 산지에 조성한 서원이라면, 필암서원은 평지에 입지한다. 경사지에 서원을 세우면 공간별 위계가 시각적으로 두드러지지만, 평지에서는 이러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문루인 확연루(廓然樓)를 지나면 나오는 강당인 청절당(清節堂)이 입구를 등진 채 사우를 바라보는 점이 건축적 특징이다. 17세기 초반부터 구한말까지 제작한 문서들이 '필암서원 문적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보물로 지정됐다. 

 

서원이 소유한 전답 규모와 소출량, 노비 등에 관한 정보를 상세하게 기록한 문서도 있으며, 노비 명단과 계보도인 '노비보'가 현존한다. 서원에 걸린 현판은 당대의 대가(大家)들인 송준 길, 송시열, 윤봉구 등이 썼으며, 호남 지역에서는 대원군에 의한 서원 훼철이 되지 않은 유일한 서원이다.

 

서원을 구성하고 있는 건축물은 크게 선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과 선현의 뜻을 받들어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과 원생들이 기숙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이 외에 문집이나 서적을 펴내는 장판고(藏版庫), 책을 보관하는 서고, 제사에 필요한 제기고(祭器庫), 서원의 관리와 식사준비 등을 담당하는 고사(庫舍), 시문을 짓고 대담을 하는 누각 등이 있다. 

 

 

건물의 배치방법은 문묘나 향교와 유사하여 남북의 축을 따라 동·서에 대칭으로 건물을 배치하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정문과 강당·사당 등을 세우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두른 다음 그 앞에 삼문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였다. 이들 대부분의 건물은 선비정신에 따라 검소 단아하게 꾸몄으며 담장의 높이는 높지 않게, 그 한쪽을 터놓아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고, 밖을 바라볼 때 자연의 산수를 접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오늘이 있기까지 필암서원 역대 원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후손들의 각고의 노력과 장성군을 비롯한 국가적 행정적 시책이 잘 융합된 결과로 생각한다. 특히 선현의 얼을 잘 이어받아 그 유적에 깃들인 정신을 면면히 계승발전 시켜 온 민중들과 선비들의 고귀한 삶의 행적을 높이 우르르고 싶어진다. 

 

이런 시대에서 후손들의 사명과 선비들의 삶의 자세는 과연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적인 고뇌의 함축과 해결의 단초를 제기하고, 삶의 행복과 향기로운 인생의 길라잡이 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때로는 적극적으로 사회현상을 고발하고, 양심에 따라 정의를 부르짖고, 계도함에 있어 선도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 무릇 선비의 대열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대부분 지성의 예리한 판단과 합리적 일관성의 바탕 위에서 올바른 가치의 정립을 통해 인간의 품위를 높이고,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외경과 존엄의 가치를 방기하지 못할 것이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모였다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지고한 가치를 존숭하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궁극적 판별을 통해 그 가치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해결을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하늘의 별들을 보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의 적극적 참여가 초연의 숭고함에 비하여 열등한가?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대도시인 광주에서 불과 30여 분의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시민이나 심지어 우리 종친님들까지도 근처에 우리 정신문화의 원류이며 역사와 철학 문학이 융합된 수준 높은 문화유적지인 자랑스러운 필암서원 존재 자체를 잘 모르고 지나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에 세계문화유산지정을 통해 우리 지역과 주변의 역사와 전통 유물과 유적 그리고 그곳에 내재된 보편적 가치를 더욱 찾아내고 발전시키는 법고창신의 일대 문화혁명이 촉발되기를 기대해 본다.

 

글. 김용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