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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호남 최고의 갑부 ‘현준호’

- 영암 학파농장과 친일파 현준호
- 친일과 민족 사이에 엇갈린 평가 

일제 강점기 호남 최고의 갑부 ‘현준호’ 

 

무송(撫松) 현준호(玄俊鎬)는 전남 영암군 학산면 침계리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당시 친일 금융인이자 기업인이다. 현준호의 아버지인 학파(鶴坡) 현기봉(玄基奉)은 신흥제철소를 설립했고, 광주농공은행 이사, 일청생명보험회사 상의원 등을 지내며 일제에 저극 협력하여 조선총독부 참의를 지낸 대표적인 친일 정치인이자 기업가이며 호남에서 소문난 갑부였다.

 

 현준호는 담양의 창평영학숙과 휘문의숙에서 공부했다. 일본 메이지대학을 유학하여 김성수, 송진우 등과 지속적으로 교유했다. 일본에서 귀국하여 호남은행을 설립하여 대표가 되었다. 조선생명보험 감사, 동아고무의 주주, 영암운수 전무, 도시제사공장 이사 등을 역임했다. 또한 동아일보 감사, 보성전문학교 감사를 역임했고 광주공립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립했다. 한편 조선민립대학(현 조선대)과 광주의학전문학교(현 전남의대)에 많은 자금을 후원했다. 

 

 현준호는 1924년 전라남도 평의원에 올랐으며, 1930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어 해방 때까지 중임했다. 중추원은 조선 총독부는 자문 기관이며 일제의 조선통치에 도움이 된 자 또는 공로가 있는 자, 그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해온 자들을 참의로 임명되어 내선일체와 황국식민화에 앞장섰던 친일의 상징이다. 

 

 현준호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총독부에 조직한 ‘시국강연반’과 ‘시국대책위원회’에 참가했다. 황국정신 고양을 위한 ‘흥아보국단’과 황민화사상 고취를 위한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징병제 홍보와 학병지원 권유에 앞장섰다. 현준호는 조선총독부에 밀월 관계를 유지하여 간척사업권을 획득하여, 1932년부터 영암 서호 간척사업을 전개하여 영암군 서호강을 막아 9,999 마지기의 대토지를 불하하여 호남 최대의 갑부가 되었다.

 

 

해방이 될 때 까지 조선총독부 산하 중추원 참의로 일제에 협력 

 

 아버지 현기봉과 아들 현준호는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에 수록됐다. 또한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과 광복회가 공동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포함됐다. 2008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1949년 친일행적으로반민특위에 체포되자 결백을 주장하여 불구속으로 수사를 받았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현준호는 장남, 차남 등과 함께 광주 형무소에서 조선인민군에게 피살됐다. 일부에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호남은행에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고, 일본인을 채용하지 않았고, 일본인에게 융자를 해주지 않은 민족 기업인이며 독립운동을 후원했던 민족 자본가라고 주장했다.

 무송 현준호의 아들 ‘현영원’은 현대상선 회장이며, 며느리 ‘김문희’는 용문학원 이사장으로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의 딸이며 전.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누이이다. 현준호의 손녀이자 현영원의 딸이 현대그룹 회장 현정은(고 정몽헌 부인)으로, 정주영의 맥을 잇는 현대그룹이 현준호의 손녀에 의해 계승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일제 패망으로도 별 영향을 받지 않았던 현준호의 흔적들이 정주영 및 현대그룹과의 만남을 계기로 새로운 운명의 단계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현준호는 사망했지만 그에 대한 역사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여기저기에 휘날리고 있다. 지금도 영암 학산면에는 현기봉의 기념비 철거를 놓고 찬반양론이 계속되고 있다.

글. 서일환<언론학 박사, 역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