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벤처기업부와 창업진흥원이 운영하는 「K-Startup Issue & Trend」는 코로나19 이후 급변하고 있는 국내외 핵심 이슈와 트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CES 2024 혁신상을 수상한 스타트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CES 2024 지난 1월 9일부터 12일까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Consumer Electonics Show)2024'가 개최되었다. CES는 세계 최대 IT 전시회로 스타트업에게는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해외 투자유치 및 판로개척을 위한 좋은 기회로 여겨진다. 이에, 중소벤처기업부와 창업진흥원은 K-Startup 통합관을 구축하여 국내 스타트업의 전시회 참여를 지원하고, 글로벌 진출을 위해 필요한 해외 투자유치 및 진출 교육, 투자자-바이어 매칭 등을 전방위적으로 제공했다. 올해 CES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국내 벤처-창업기업 128개사가 CES 혁신상을 수상해, 역대 최다 수상을 기록한 것이다. CES 혁신상은 박람회를 주최하는 미국소비자기술협회가 세계를 선도할 혁신 기술과 제품에 수여하는 상으로, 'CES 최고의 영예'로 불린다. 올해는 인공지능(AI), 디지털 헬스, 스마트시티,
아직 찬바람이 일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이른 봄이지만, 고색이 창연한 필암서원 확연루(廓然樓) 주위의 매화 고목등걸에서는 오랜 연륜을 자랑하듯, 듬성듬성 백매, 홍매(紅梅)가 북풍한설을 이겨낸 결기를 자랑하듯 피어나고 있다. 매향(梅香)은 아득하여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미 심향(心香)으로 스며들어 그 고고함을 느끼게 한다. 청절당에서는 도포 입 은 선비들의 강독 소리가 상기도 청아하게 들리는 듯한데, 동재에서는 선비문화의 강연회가 열리고 있었다. 최근 장성군이 필암서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2022년도부터 100억여 원의 예산을 확보하여 '필암서원 선비문화 세계화 사업추진'이라는 비전하에 '필암서원을 한국의 선비문화의 본향으로 삼아 세계화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업을 전개하고, 문정공 하서 김인후(文正公 河西 金麟厚) 선생을 모신 필암서원과 묘소, 신도비, 통곡단, 어사리 등 하서와 관련된 모든 유무형의 유적을 재발굴 조명하고 디지털화하여 후세에 선비문화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감개무량하였다. 하서 김인후는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학문적 소양을 갖춘 성군인 정조대왕(正祖大王)이 도학절의문장(道學節義文章)의 해동 제일인자라고 극
나는 여섯 살 무렵이었던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할머니와 OO광역시 지원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만 4년을 살았고 국민학교(그 당시 초등학교의 명칭) 3학년 반 배정까지 받은 상태에서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2학년 겨울 방학을 보내던 중에 가게 된 전학이었기에 친구들에게 안녕을 고하지도 못한 채 준비 없이 맞이하게 된 내 생애 첫 번째 긴 이별이었다. 나는 OO광역시 모 국민학교에 1학년 1반으로 입학을 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부모 밑에서 다니는 학교생활이었지만, 나는 할머니 손에서 다니게 되었다. 처음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한 첫 담임 선생님은 아버지 연배의 남자 선생님이셨다. 마른 체형에 키가 크셨고 대머리에 항상 베레모를 착용하고 다니셨다. 숫기가 없고 말이 없던 나는 그저 누가 무엇이라 말하면 웃기만 한 아이였다. 나를 기억하는 친구들 역시 나에 대한 이미지를 떠 올릴 때면, "늘 웃으며 말이 없고, 듣기만 하는 친구"로 그들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복도 청소를 하는 어느 날이었다. 복도는 나무로 된 바닥재였으며, 우리는 초를 칠하고 걸레로 닦으며 신나게 미는 데 열중하였다. 복도 끝에서 부터 끝까지 두 팔로
나는 1남 1녀를 두었다. 이 아이들이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 면 하는 게 있었다. 다름 아닌 라면 끓이는 것과 계란 프라이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해줄 수 없으니 직접 해서 먹으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종 종 주변 엄마들에게서 들어보면 불이 무 섭기 때문에 자신들은 직접 해서 먹인다는 것이었다. 이런 소리 들을 때마 다 '나에겐 나쁜 계모 기질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기에 나는 가르쳤다. 일과 육아를 둘 다 책임지고 있는 워 킹 맘이었으니.... 그 당시 남편들에게 육아나 가사에 그다지 도움받으며 살 던 시대가 아니어서 더 더욱 그러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 아들이 취사병으로 보직을 받아 군 복무 잘하고 전역을 하였다. 그 뒤로 못하는 음식이 없었다. 엄마인 나도 엄두 내지 못하는 한식, 양식들도 곧잘 해서 내어 오곤 하였다. 그래서 함께 하는 동안 자주 먹을 수 있을 것 으로 알았다. 그런데 아들도 바빠지고 가족들도 바빠지니 함께 할 수 있는 시간들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다 아들이 결혼식을 앞두던 마지막 여름. 가족들을 위하여 삼계탕 을 끓여내겠다고 하였다. 자신이
이낙연 전 대표가 11일(목) 오후 2시 민주당 탈당을 공식 선언했다. 전진숙 후보는 “이낙연 전 대표의 탈당은 민주당에서 많은 혜택을 누린 정치 지도자로서 해선 안 될 행위를 한 것이다”라며 강하게 질타했다. 전진숙 후보는 “정치 지도자의 길은 품위와 기품이 있어야 한다며 이 전 대표는 평소에 신중함과 기품있는 정치인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지금의 행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낙연 전 대표는 민주당에서 당 대표와 민주당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 지도자로서 다른 탈당 정치인과 달라야 했다. 다른 정치인들이야 자신들의 정지적 유불리에 따라 탈당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 대표는 평소에 민주당이 자신의 ‘정신의 집’이라고 강조했는데 이런 모든 발언들이 허언이었던 것인지 묻고 싶다.”고 했다 이낙연 전 대표가 한국 정치의 혁신과 변화를 위한 선택이라고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 자명하다.전진숙 후보는 이낙연 전 대표 선택은 “총선에서 보수정권을 돕는 행위로 윤석열 정권의 중간평가 성격인 총선을 민주당 심판 선거로 전환하려는 국민의힘을 전략에 협력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 지적했다. 전진숙 후보는 “더욱 심각한 것은 이낙연 전 대표가
어느 날 아침 아들이 급하게 날 깨우며 말하길, 영등포역까지 태워다 줄 수 있겠냐는 것이다. 알았다고 하였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아들 말에 눈곱도 떼지 않고 수면 바지 위에 긴 털 코트만 걸쳤다. 양말도 신지 않은 채 앞, 뒤 터진 털 슬리퍼였지만 발이 시린지도 모른 채 차에 대기하고 있다 아들을 태워 역에서 내려주었다. 아들을 태워 데려다주고 집에 오니 딸이 출근할 준비를 다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직장 동료들과 술 한잔하는 바람에 차를 놓고 왔으니 출근을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오빠 요청은 들어주고 자기 요청은 들어주지 않느냐는 말이 나올까 싶어 두말없이 알겠다고 하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오늘 오전 시간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무엇 하나 달라질 것 없는 차림새로 현관문 앞에서 그대로 턴 하여 딸을 태워다 주었다. 가는 길에 절친이 운영하고 있는 상담 오피스텔이 보였다. 모닝커피나 한잔하고 갈까 싶어 전화하니 함께 마시자며 오라고 하였다. 빠져나오기 쉬운 곳에 주차하고 나의 꼴을 보자니 영락없이 나사가 빠진 모습 그 자체였다. 수면 바지와 헐렁한 나시 티 위에 털 코트로 상체를 감싸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경비실 아저씨에게
이낙연은 환영적 우월감(illusory superiority)에서 벗어나야 한다(下) 이낙연는 동아일보 기자, 국회의원, 전라남도 지사, 국무총리 그리고,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다양한 공적 직책을 맡은 자이다. 그런데 그런 화려한(?) 경력을 갖는 자이기에 전 동아일보 기자, 전 전라남도 지사, 전 국무총리, 전 더불어민주당대표 등의 칭호를 붙이고 싶었지만 이낙연으 그동안의 여러 조직들을 거치면서 그가 이뤄낸 업적 및 행적을 보면 그 어느 직함도 붙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는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을 할 때 신문 지상에 알려진 사건들을 파악해 보면 뚜렷한 실적을 내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주관적인 기술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두 번에 걸쳐 제시하는 글로 이번은 2회차이다. 이낙연이 어떤 능력을 갖춘 정치인인가를 독자들 스스로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먼저 이 칼럼 상편에 게시한 글의 개요를 다시 제시하고 이번 칼럼을 마무리 하겠다. 첫째는 이낙연은 전 동아일보 기자일 때 전두환 찬양 기사로 시민들로부터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었다. 둘째는 이낙연이 전 국회의원일 때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에 가결에 찬성했나 반대했냐는 질문에 이낙연은 200
아침 출근 준비는 언제나 분주했다. 그렇기에 출근하는 길에 어디를 들려서 간다는 것은 더더욱 바쁘고 분주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늘 언제나. 내게는 우리 집과 가까이 살고 계시는 친정엄마가 계셨다. 시간 개념 없이 전화하시는 엄마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를 놓칠 때가 많았다. 어느 금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돌아가시기 삼 일 전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걸려온 전화를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받게 되었다. 엄마의 말씀은 오전에 봉천동 현대시장에서 장을 보고 오겠다는 말씀이셨다. 그날은 나의 일정상 늦게 출근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출근하는 길에 모시고 시장에 내려드리겠다고 전해 드렸다. 시장에 내려드린 날 오후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받지 않으셨다.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밀려왔다. 시장에 내려드릴 때 쉽게 그곳을 알아보지 못하시고 "여기가 어디냐? 오메"라며 엄청 숨차 하시고 장소를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셨기에 드린 전화였다. 내려드릴 당시 좌회전 차량들이 계속 오는 상황이라 엄마를 내려드리기 바빴고 교통 흐름 상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엄마는 세 번째로 전화를 드렸을 때 비로소 받으셨다. 휴~ 다행이었다. 나도 무언가 직감을 한
이낙연는 동아일보 기자, 국회의원, 전라남도 지사, 국무총리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다양한 공적 직책을 맡은 자이다. 그런데 그런 화려한(?) 직책을 맡은 자이기에 전 동아일보 기자, 전 전라남도 지사, 전 국무총리, 전 더불어민주당대표 등의 칭호를 붙이고 싶었지만 이낙연의 그동안의 여러 조직들을 거치면서 그가 이뤄낸 업적 및 행적을 보면 그 어느 직함도 붙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는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을 할 때 신문 지상에 알려진 사건들을 파악해 보면 뚜렷한 실적을 내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주관적인 기술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두 번에 걸쳐 제시하니, 이낙연이 어떤 능력을 갖춘 정치인인가를 독자들 스스로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첫째는 이낙연이 전 동아일보 기자일 때 전두환 찬양 기사로 시민들로부터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었다. 이의 발단은 ‘서울의 봄’ 계기로 회자되는 ‘전두환 찬양’ 기사이다. 이낙연은 1979년 신문사에 입사했고 전두환은 1980년 대통령이 됐다. 비슷한 시기 한 사람은 동아일보에, 또 한 사람은 청와대에 둥지를 튼 셈이다. ‘전두환 찬양’의 진위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 ‘이낙연 기자’의 과거 기사를 확인
면앙정 송순(宋純, 1493년 성종 24년∼1583년 선조 16년)은 담양에서 태어나서 호남 사림의 중조인 눌재 박상(朴祥, 1474~1530), 육봉 박우(朴祐, 1476~1546, 사암 박순의 아버지) 형제에게 학문을 배웠다. 종9품으로 출사하여 50년 만에 정2품까지 승진했다. 교우로는 성수침(成守琛, 1493~1564, 우계 성혼의 아버지), 이황(李滉, 1501~1570), 양산보(梁山甫, 1503~1557, 담양 소쇄원을 조성한 이) 등이 있었고 문인(門人)으로는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송강 정철(1536~1593), 백호 임제(1549~1587) 등이 있었다. 중종의 장인인 외척 김안로가 권력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연을 벗삼아 담양에서 4년간을 지냈다. 김안로가 탄핵을 받아 사사되자 송순은 경상도 관찰사로 복직했다. 중종의 처남인 외척 윤원형이 권력을 전횡하여 송순은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복직했다. 송순은 77세에 정2품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하자 벼슬을 사양하며 다시 담양으로 낙향했다. 성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워 주변에
우리나라 산림은 2~30㎝이상 쌓여 있는 낙엽들로 인하여 쉽게 발화되어 광범위한 지역에 큰 재난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건조한 계절이 오면 산림부서 공무원들은 산불조심기간 비상근무에 돌입한다. 이 기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산불예방 및 산불 진압을 위해 상황실에 상주하며,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 산림청에서는 산불재난으로부터 산림과 삶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해 산림부서 공무원 외에도 산불전문 인력을 편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특히 봄, 가을철과 같은 산불 다발 시기에는 산불감시 인력을 집중 배치하여 산불 감시 및 초기진압에 힘을 쓴다. 또한 군, 경, 소방서, 산림항공본부 등의 유관기관과 협력하여 철저한 재난 대응을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최근 산림 주변 개발, 독가촌 및, 귀촌 인구 등의 증가로 과거에 비해 산불 발생 위험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3~2023.11.) 발생한 산불은 5,368건(35,597ha)이다. 나무를 심고 울창한 숲으로 가꾸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산불로 인해 잿더미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산불은 일단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고 다시 원상태로 복원하는 데에도 수십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받기 위해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자겸은 정2품 상서좌복야 (尙書左僕射) 이호와 통의국대부인 (通義國大夫人)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부인 최씨는 종1품 시중(侍中) 최사추의 딸이었다. 조부 이자연은 종1품 중서령(中書令)을 지냈고 외조부 김정준은 정2품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이자겸은 16대 임금 예종의 장인이 되어 음서로 벼슬을 시작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결국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이자 겹장인까지 되어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칭하며 온갖 전횡을 일삼았다.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이자겸의 난’ 일으켜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진족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고려를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을 믿고 인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하였다. 인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자겸이 왕궁을 불사르고 인종을 유폐시키고 국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하지만 왕족 이수와 귀족 김부식이 ‘이자겸의 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