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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조선의 시인5-6. 황현(黃玹)과 양사언(楊士彦)

조선의 시인5. 황 현 (黃玹)

 

絶命詩(절명시) / 황현(黃玹)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황현은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며 전라도 광양 출신으로 구례에서 성장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우하며 흥선대원군과 민씨척족의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일본과 외세의 침입 등의 현실을 보면서 많은 서적을 읽었다.  
 
황현은 보거과(保擧科)에 합격했으나 문벌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원에서 3등급이 하락되는 현실을 사대를 한탄하며 낙향하여 역사책을 저술을 하였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국을 통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1910년 국권 피탈이 선포되자 황현은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황현은 편년체 역사서인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유고집 매천집(梅泉集)을 남겼다.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조선의 시인6. 양 사 언 (楊士彦)

 
양사언(楊士彦)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종6품 돈녕주부 양희수의 아들이다. 어머니가 적모(嫡母)가 아닌 첩이라서 서얼(庶孼)로 성장했다. 서얼은 첩(妾)에서 나온 자손을 뜻하며 중인으로 취급하여 문과(文科)에 응시할 기회가 제한됐다.  
 
양희수는 정실부인 은진 송씨와 사이에 양사준을 낳았고 재취부인 문화 류씨와 사이에 양사언과 양사기를 낳았다. 문화 류씨는 장독대에서 백일기도 끝에 양사언을 낳았다고 한다. 양사언은 첩의 자식이라 서얼로 천대받자 금강산을 유람했다.  
 
정실부인이 사망하자 문화 류씨가 3형제를 훌륭하게 키웠다. 양희수가 사망하자 문화 류씨는 적장자 양사준에게 '이복동생 사언과 사기가 서자라는 딱지를 벗겨 달라' 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했다.  
 
적자인 양사준은 아버지가 사망하며 3년 복을 입지만 서모인 문화 유씨가 사망하면 3개월 복을 입는다. 결국 문화 유씨가 사망하면 양사언과 양사기는 서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문화 류씨가 자결하여 복제를 혼동하게 하였다.  
 
양사언은 어머니 덕분에 과거시험을 볼 수 있게 되어 문과에 급제하여 삼등현감 평창군수 강릉부사 등을 역임했다. 안변도호부사로 재직 중 이성계의 증조부 묘에 불이 나서 황해도로 유배됐고 해배되어 돌아오던 길에 객사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은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산)만 높다 하더라 

 
안평대군, 김구, 한석봉과 함께 조선 전기의 4대 명필로 불렸던 양사언이 남긴 태산가(泰山歌) 이다. 사준(士俊), 사언(士彦), 사기(士奇) 3형제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당나라의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에 비유했다.  
 
조선은 1부 1처 처첩제로 서얼은 법적으로 양반이나 사회적으로 중인의 대우를 받았다. 선조 때 서얼이 음관(蔭官)으로 벼슬을 하였고 영조 때 서얼들이 청요직에 진출했다. 선조, 광해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철종, 고종 등이 서얼 출신이다  
 
이성계의 적자인 이방원은 서자인 왕세자 이방석을 몰아내는 왕자의 난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 태종으로 즉위하여 서자들의 관직 진출 금지령을 내렸다. 성종은 적서의 차별과 서자의 관직 제한을 경국대전에 성문화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