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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박상희와 정율성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박상희

 

박상희(朴相熙)는 1905년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가족들은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로 이사했다. 구미보통학교 졸업했고 대구사범고등학교에 낙방했다. 

박성빈은 몰락 양반가 출신으로 정9품 효력부위(効力副尉)를 지냈고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처형 직전에 사면됐다. 백남의는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었다. 박성빈과 백남의는 박상희와 박정희의 부모이다. 

박상희는 선산청년동맹의 준비위원 상무위원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해 결성한 신간회(新幹會) 간부로 항일활동에 앞장섰다,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의 대구지국장과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등으로 활동했다. 

박상희는 황태성과 함께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건국동맹 (朝鮮建國同盟)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했고 인민위원회 구미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했다. 

박상희는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반탁운동을 지도하다가 남노당의 지시에 따라 침묵으로 일관했다. 

1946년 10월 1일 미군정의 쌀 배급 정책이 실패로 인해 대구에서 발발한 10월 폭동이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이 사망했다. 박상희는 10월 폭동이 경상북도 일대로 확산되자 선산 구미 지역에서 시위를 지도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 군정이 친일관리를 고용하고 토지개혁을 지연하며 식량 공출 정책을 강압적으로 시행하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으로 10월 폭동을 규정했다. 

1946년 10월 3일 구미에서 2,000여 명의 군중들이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면서 구미경찰서와 군청을 접수했다. 박상희는 10월 5일 시위대와 경찰을 중재하던 중에 군정청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황태성은 박상희가 사망하자 월북했고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와의 친분을 내세워 비밀 특사로 남파했다. 박정희는 황태성을 간첩으로 처형했다. '황태성 밀사 사건'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박상희가 사망하자 동생 박정희는 충격을 받고 남로당에 가입했다. 여순사건 직후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체포됐다.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다시 징역10년으로 또다시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박상희의 딸이자 김종필의 부인인 박영옥은 "아버님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부당한 평가에 시달리며 지금까지 지내 왔다. 별세하신 지 60년이 지나도록 묘비 하나 없이 싸늘한 땅에 누워 계셨다" 라고 토로했다.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음악가 정율성

 

정율성(鄭律成)은 일제강점기에 전라도 광주 양림동에서 한학자인 정해업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해업은 광주 수피아여고 교사로 광주 지역 신간회 간사를 역임하며 모든 자녀를 항일 투쟁을 위해 중국에 유학을 보냈다. 

 

정율성은 어린 시절 큰외삼촌 최흥종 목사와 작은외삼촌 최영욱 원장의 집에서 서양 음악을 접했다. 화순 능주보통학교,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했고 전주 신흥학교에 입학하여 합창단에 들어가 '내고향' '쪼각달' '까투리타령' 등을 지도했다. 

 

최홍종은 광주 출신의 목회자로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고,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광주 YMCA 회장과 신간회 광주지회장을 역임했고,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무등산에 은거했다. 

 

최영욱은 광주 출신의 의사로 광주 제중병원장과 미군정청 전남도지사를 역임했다. 소록도와 애양원을 인수하여 운영했고,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사망했다. 부인 김필례는 수피아여고 및 정신여고 교장을 역임했고 육영사업으로 일생을 보냈다. 

 

정율성의 셋째형 정의은이 김원봉의 의열단과 조선혁명당의 조직 강화와 민족해방운동에 필요한 전위혁명가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 난징(南京)에 중국 난징에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졸업하고 학생모집을 위해 귀국했다. 

 

정율성은 전주신흥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 입학하며 의열단에 가입했다. 소련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 크리노와(Krenowa) 교수에게 성악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 등을 배웠다. 

 

정율성은 중국공산당의 당원이 되어 '팔로군행진곡'을 작곡했다. '팔로군행진곡'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가 되었다.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하며 '유격전가', '조선의용군행진곡', '연안송' 등을 작곡했다. 

 

정율성은 해방이 되자 북한으로 들어가서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선해방행진곡', '두만강' 등을 작곡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중국으로 돌아갔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중국인민지원군 소속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정율성은 1976년 사망하여 바바오산의 혁명투사 공동묘지에 묻혔다. 후진타오 주석은 정율성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으로 선정했고, 광주광역시와 전라남도는 기념사업을 개최했다. 현재 정율성은 이념논쟁의 중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