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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우리 민족의 전쟁 5~6화

우리 민족의 전쟁5. 고려와 금나라의 고려-여진 전쟁
우리 민족의 전쟁6. 고려와 원나라의 고려-몽골 전쟁

우리 민족의 전쟁 5~6화

 

우리 민족의 전쟁5. 고려와 금나라의 고려-여진 전쟁
 
여진(女眞)은 만주와 함경도 지역에서 거주하는 숙신-말갈계의 유목민족으로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 여진은 오랫동안 체계적인 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고 거란에 복속되어 생활했다.  
 
1104년 고려 윤관은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족을 천리장성 밖으로 쫓아내고 동북 9성을 축조했다. 고려는 갈라수 전투에서 패배하고 2년 만에 여진족에게 동북 9성을 빼앗겼다.  


 
1115년 완안아골타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대금(大金)을 건국하고 요나라를 공격했다. 금태종은 1125년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1126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을 멸망시켰다. 1127년 황족 조구가 강남에서 남송을 재건하여 고종으로 즉위했다.  
 
조부 이자연은 세 명의 딸을 11대 문종에게 시집보내 문종의 장인이자 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의 외조부이자 14대 헌종의 외증조부이다. 손자 이자겸은 차녀를 16대 예종에게 3녀와 4녀를 17대 인종에게 시집보내 예종과 인종의 장인이자 인종의 외조부이다.
 
"지금 금나라는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다"라며 이자겸은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와 여진의 연호 사용을 주장했다.
 
이자겸의 난은 진압됐지만 궁궐은 불에 타고 정치기강은 해이해지고 민심이 더욱 흉흉해졌다. 인종은 내제외왕(內帝外王)의 외교정책으로 금태종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표(誓表)를 제출하고 속국을 자임하여 고려왕으로 책봉을 받았다.
 
묘청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서경 천도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칭제건원을 주장하며 국호를 대위(大爲)로 연호를 천개(天開)라고 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우리민족 역사상 1천년 내의 제1대 사건’으로 평가했다  
 
아시아는 금나라의 속국 고려와 금나라에 쫓겨난 남송을 대신하여 금나라 중심의 국제질서로 재편됐다. 금나라는 1115년 건국되어 1234년 몽골족 원나라에 멸망했고, 1170년 고려는 무신정권이 수립되어 수탈이 강화됐고 국가 재정은 악화됐다.

 

 

 
우리 민족의 전쟁6. 고려와 원나라의 고려-몽골 전쟁
 
고려는 3차에 걸친 거란족 요나라의 침입으로 재정이 파탄났고, 여진족 금나라에 굴욕스러운 사대외교로 평화를 얻었다. 하지만 과거제와 음서제를 통해 합법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특권을 세습하여 소수의 문벌귀족 가문에 권력과 경제가 집중됐다.  
 
문벌귀족의 모순으로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귀족들의 탐학과 수탈로 민심은 이반했고 국왕의 권위는 추락했다. 문신들의 유흥으로 무신들은 굶주렸다. 김부식의 아들이자 내시인 김돈중이 촛불로 정3품 상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웠다.  
 
1170년 정중부가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했다. 정중부에 이어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최우, 최항, 최의, 김준, 임연, 임유무로 이어졌다. 1270년 임유무가 살해될 때까지 100년 동안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합하여 몽골국(蒙古國)을 건국했다.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유럽을 유린하며 가장 큰 단일제국, 가장 큰 육상제국, 가장 큰 유목제국, 가장 큰 황제국으로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을 세웠다.
 


1225년 칭기즈칸의 칙서를 가지고 고려를 방문한 몽골국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돌아가던 중 압록강 근교에서 산적들에 의해 살해당하자 몽골국은 고려와 국교를 단절했다. 고려는 몽골이 침략의 빌미를 만들기 위한 자작극으로 판단했다 . 
 
1차 침략은 1231년 살리타이가 개경을 포위하자 고려의 평화협상으로 다루가치 72명을 남기고 철수했다. 2차 침략은 1232년 살리타이가 개경을 함락하자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했고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저격하자 철수했다.  
 
3차 침략은 1235년 탕구타이가 4년 동안 전국을 유린하여 황룡사를 불태웠다. 팔만대장경 제조를 시작했고, 고려왕의 입조를 조건으로 철수했다. 4차 침략은 1247년 이모간이 입조를 요구하며 침략했고 몽골국의 후계자 문제로 철수했다.  
 
5차 침략은 1253년 3대 예케가 몽케 칸이 즉위하자 침략했고 고려가 항복을 표하자 몽골군이 철수했다.

6차 침략은 1254년 자랄타이가 고려왕 출륙을 요구하며 침략했고 2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7차 침략은 1255년 자랄타이가 침략했고 몽케 칸을 설득하자 몽골군이 철수했다.

8차 침략은 1257년 자랄타이가 다시 침략했고 고려왕의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몽골군이 철수했다.  
9차 침략은 1257년 자랄타이가 고려왕의 입조와 출륙을 요구하며 또다시 침략했다. 1259년 고려 태자 왕식이 강화를 맺기 위해 몽골국에 갔다가 고종이 사망하자 원종으로 즉위했다. 고려는 몽골국에 항복하고 강화에서 38년 만에 개경으로 환도했다.  
 

 

1260년 몽골국 몽케 칸이 사망하자 쿠빌라이 칸이 즉위하여 '몽고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라고 불개토풍(不改土風)을 약속했다. 1270년 무신세력이 제거되자 38년 만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했다.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고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삼별초가 항전했으나 고려-몽고연합군에 의해 진압됐다. 1271년 쿠빌라이가 대몽골국을 '대원(大元)'으로 개칭했다. 1276년 쿠빌라이가 남송을 정벌하고 이민족이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