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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 두목, 이상은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 두목, 이상은

 

당나라의 시인3. 백거이
호는 향사거산(香士居山), 이칭, 백낙천(白樂天)
 
장한가(長恨歌) / 백거이(白居易)  
칠월칠석에 장생전에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리라
하늘과 땅도 끝이 있고 시간조차 다함이 있으나
이 한만은 영원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양귀비(楊貴妃)는 쓰촨성 촉주현에서 하급 관리의 4녀로 태어나서 당현종 이융기의 아들인 수왕 이모(壽王 李瑁)와 혼인하여 시아버지 당현종의 첩이 되었다. 수왕 이모는 부인 양귀비를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승려가 되었다.  
 
양옥환은 22세였고 당현종은 57세였다. 양귀비의 오빠는 양소는 당현종으로부터 양국충을 하사받고 승상이 되었다. 양국충에 위기감을 느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도망갔고 양귀비는 자결했다.
 
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한무제와 이부인의 고사를 인용하여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은 서사시이다. 장한가를 파사하는 선비가 많아 낙양의 종잇값을 폭등시킨 원인이 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장한가의 시작은 양귀비가 당현종의 사랑을 받다가 안사의 난으로 자결하는 장면, 중간은 양귀비가 죽은 후에 괴로워하는 당현종의 모습, 마지막은 당현종이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보는 장면으로 구성됐다.  
 
백거이(白居易)는 당나라 때 뤄양(洛陽)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이백 두보 한유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 이라 하였다. 32세에 장한가(長恨歌), 45세에 비파행(琵琶行)​을 남겼다. 항저우에 재직하며 시후(西湖)를 축조했다.  
 
비익조(比翼鳥)는 한쪽 눈과 한쪽 날개만 가지고 태어 난다고 하는 전설의 새로 암수가 몸을 서로 의지해야만 하늘을 날 수 있다. 연리지(連理枝)는 한 나무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서 나뭇결이 하나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비파행(琵琶行)​ / 백거이(白居易)  
오늘 밤 그대의 감정 어린 비파 소리 들으니
신선의 음악을 들은 듯 귀도 맑고 기분도 좋소
원하노니, 사양 말고 고쳐 앉아 다시 한 곡
그대 위해 오늘 밤의 사연을 비파의 노래로 쓰려하오
내 말에 감동하여 여인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이윽고 다시 앉아 현을 가려 가락 빠르게 연주했다
그 소리 쓸쓸하여 먼저의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게 처절했나니
배 안에 가득 앉은 사람들은 거듭 얼굴 가리고 울었다
그 가운데서 가장 많이 운 것은 누구였던가
강주사마인 나의 푸른 옷깃은 눈물로 흠뻑 젖었다

 

 

당나라의 시인4. 두목  
자는 목지(牧之), 호는 번천(樊川)이다.

 

제오강정(題烏江亭) / 두목(杜牧)   
전쟁에서 승패의 향방은 전략가라도 예측할 수 없는 것
부끄러움을 안고 치욕을 참을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사나이라
항우의 고향 강동의 젊은이 중엔 뛰어난 인물 많았으매
권토중래하였다면 그 결과 아무도 몰랐으리라  
 


진나라는 제(齊), 연(燕), 조(趙), 한(韓), 위(魏), 진(秦), 초(楚)의 일곱 개 제후국을 정복하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와 과중한 부역으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의 권력 싸움으로 민심이 이반됐다.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항량은 초나라 회왕(懷王)의 후손을 초의제(楚義帝)로 추대하여 명분을 확보했다. 유방은 함양을 공격하여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다. 항우는 초의제를 살해하고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즉위했다.  
 
유방은 초의제의 복수를 명분으로 항우를 공격하여 서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은 5년간 초한전쟁(楚漢戰爭)을 시작했다. 안후이성 동쪽의 창강(長江) 유역의 나루터인 오강정(烏江亭)에서 마지막 결전인 해하전투(垓下戰鬪)가 벌어졌다.  
 
당나라 시인 두목은 사면초가에 빠져 해하가(垓下歌)를 부르며 자결한 항우가 권토중래하지 않음을 아쉬워하였다. 중국의 속담에는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라고 하였다.  
 
두목은 당나라 후기에 산시성에서 태난 호방하고 웅장하고 남성적인 시를 남긴 천재시인이다. 항저우 추저우 무저우 후저우 등에서 자사를 지냈고 종4품 중서사인이 되었다. 여인들과 많은 염문을 뿌린 풍류남아로 알려졌다.

 


당나라의 시인5. 이상은
자가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谿生)이다. 
 
무제(无题) / 이상은(李商隱)  
만남도 어렵지만 헤어짐도 어려워
동풍이 멎으니 온갖 꽃이 시드 누나
​봄누에는 죽어서야 실을 그만 뽑고
양초는 재가 되어야 비로소 눈물이 마른다오
새벽녘 근심으로 거울 속 흰머리는 날로 늘어나
깊은밤 시를 읊다가 달빛의 차가움을 느낀다오
​봉래산 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파랑새야 살며시 날 위해 찾아가 주려무나  

 

 

 

이상은(李商隱)은 당나라 때 허난성(河南省) 출신의 시인으로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낙양으로 이사했다. 당나라 14대 문종은 환관의 농락으로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하여 환관을 모살하려다가 오히려 환관에게 살해됐다.  
 
당나라의 황궁은 환관들이 장악하고 지방은 절도사가 정악했다. 이상은은 과거 급제파의 비호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하였다가 문벌 귀족파의 천거로 교서랑(校書郎)에 임명됐다. 하지만 과거 급제파와 문벌 귀족파의 파벌싸움에 변절자로 몰렸다.  
 
이상은은 지방관리로 전전하며 제목을 짓지 않고 화려하고 관능적이며 아름답고 애절한 서정시를 남겼다. 삼국시대의 고사 인물 유적 등을 읊은 교아시(驕兒詩)를 남겼고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한 수나라를 비난하며 47세에 사망했다.  
 
이상은은 이백, 두보, 두목과 함께 당나라 4대 시인의 한 사람이며 백거이로부터 “죽어서 너의 자식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라는 극찬을 받았다. 송나라에 이상은의 작법(作法)을 본받아 아름다운 시어를 사용하는 서곤체(西崑體)가 유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