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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잊혀진 애국지사) 순국열사 홍범식과 의열단 김시현

(잊혀진 애국지사)  순국열사 홍범식과 의열단 김시현

순국열사 홍범식
홍범식(洪範植)은 정2품 이조판서를 역임한 홍우길의 손자이며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홍승목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를 시작으로 내부주사와 혜민서참서를 역임했다. 태인군수로 재직 중에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 보호책을 펼쳤다.  
 
1907년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불평등 조약인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했다. 한일신협약은 정미 7늑약(丁未 七勒約), 3차 한일협약(三次 韓日協約) 이라 부른다.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했다. 일제는 특사 파견을 빌미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대한제국 군인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인영과 허위를 중심으로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했다.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 소탕 작전을 자행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든지 조선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 아버지 홍범식이 아들 홍명희에게 남긴 유서의 일부이다.  
 
홍범식이 금산군수로 재직 중에 1910년 한일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수치와 설움을 참지 못하고 유서를 남기고 소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2000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홍승목은 홍범식의 아버지로 한일합방 조약에 찬성하고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고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 기념장을 받았다. 홍승목은 친일파로 708인과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등에 선정됐고 친일인명 사전에 등재됐다.  
 
홍명희는 홍범식의 아들로 22세에 아버지가 자결하자 일본 유학 중에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3.1 운동과 신간회 사건으로 구속됐고 대하소설 임꺽정을 저술했다. 해방 이후 월북하여 금기의 인물이 되었다. 

 

 

의열단 김시현
 김시현은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에서 태어나서 서울 중교의숙(中橋義塾)에서 수학했다. 일본으로 건너가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상주 헌병대에 구금되어 석방되자 만주 길림으로 망명했다. 

 

김시현은 1920년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 1922년 김익상의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저격사건, 1924년 김지섭의 도교 황궁 폭파사건 등 의열단원들의 테러 사건의 배후에서 지시했다. 동양 최초로 시한폭탄을 제조했다.  
 
김시현은 일제강점기 여섯 차례나 체포되어 18년 7개월 동안 대구 형무소, 나가사키 형무소, 경성 헌병대 등 감옥에서 보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출감했다. 1950년 안동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52년 6월 25일 임시수도 부산 충무동 광장에서 6·25 2주년 기념 및 북진촉구 시민대회에서 백범 김구 암살에 대한 응징으로 유시태와 공모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암살하려다 실패했다. 유시태는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7년 동안 옥살이를 했었다.  
 
국회의원 김시현은 이승만 암살 배후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다시 무기형으로 감형됐다. 1960년 이승만이 하야하자 석방되어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정계에서 은퇴했다.  
 
부인 권애라와 동생 김정현은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수여됐다. 아들 김봉년은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선생님이라 불렀으며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어 해방이 되자 석방됐다. 


김시현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독재에 항거하여 27년 8개월 동안을 감옥에서 지냈다. 하지만 독재자 이승만 저격 사건으로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해 훈장하나 받지 못하고 아직도 명예는 회복되지 않고 있다.  


하늘은 인간을 용서하지만 역사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역사의 심판이다. 친일 매국노에게 역사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에게 영광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