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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명절과 고향길

 영암군 곤이종면(昆二終面)은 일제 강점기에 서쪽의 영산강에 접하고 있다하여 서호면(西湖面)으로 개칭했다. 산골정은 가미카제를 뜻하는 신풍(神風)으로 변경하고, 장복골을 려몽연합군을 물리쳤다는 뜻으로 영풍(靈風)으로 변경하여 쌍풍리(雙豊里)라고 하였다. 

 

 

산골정은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천서씨의 소호종가(蘇湖宗家)이다. 산골정은 큰 동네와 작은 동네로 나누어졌다. 작은 동네는 산골정에서 혼인을 하면 새로 살림을 내어주어 새로 생긴 터라는 뜻에서 새터마을이라 한다. 

 

설날 아침이면 형제들끼리 모여서 큰집, 작은집 등 대소가(大小家)에 세배를 다닌다. 산골정은 모두가 친척이 되기 때문에 10촌 이상의 먼 집안은 다음날 세배를 다녔다. 당숙에게 세배 중에 다음 형제들이 들어오면 거기서 세배를 하기도 한다. 

 

세배를 하면 점심 되기 전에 한잔 한잔 마시던 술에 취하기도 한다. 물론 음식을 잘하는 집에서만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다. 문산 댁은 회갑이 넘어서 집안 어르신에게 떡국을 끓여 세배하러 다니는 것을 마쳤다.

 

추석날은 성묘를 다녀와서 송편이나 광을 싸가지고 대박산에 올랐다. 대박산에 올라가면 월출산 천왕봉은 물론 유달산과 영산강이 한눈에 보인다.

 

대박산에는 호랑이가 살았다는 호랑이 정개가 있고, 높고 위험한 남자 바위와 낮고 안전한 여자 바위가 있었다. 남자는 국민학교 5~6학년 때 남자바위를 올라가야 사내 대장부로 인정을 받았다. 지금 보니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곳이었다. 

 

요즘은 명절이 되면 고향으로 내려오는 아들보다 서울로 올라가는 어른들이 많아졌다. 최근에는 추석 전에 합동으로 조상묘를 벌초 한다. 우리 집안은 벌초를 끝내고 50여 명이 함께 점심을 먹는 최대 행사가 되었다.

 

 

   초등학교는 애향단장이 깃발을 따라 왼쪽 길로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가끔씩 신작로에 먼지를 내고 지나가는 트럭을 뒤따라 달려가기도 하였다. 막차가 들어가는 시간에는 올 사람도 없는데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을 구경을 나가기도 하였다. 

 

중학교는 자전거로 모개잔등을 넘어 학교에 다녔다. 동네 앞으로 강원여객과 광전교통의 시외버스가 하루에 2번 왕복했다. 태백, 금강, 성재 등 안떼에서 사는 여학생들은 버스를 타고 다녔고 남자들은 대부분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산골정은 고작 오리 거리라서 걷기도 좋았고 자전거 타기도 좋았다. 안떼 학생들은 10리에서 20리까지 되는 통학길을 자전거로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린 다음 날은 비포장도로의 자전거길은 여간 고행이 아니였다. 

 

 

고등학교를 광주로 유학 와서 토요일이 되면 수업이 끝나고 한 달에 한두번씩 고향에 내려왔다. 쌀도 가져가고 김치도 가져가고 내려오고 올라가는 길에 친구들도 만나고 그냥 좋았다.

 

영암으로 내려갈 때는 대인동 터미널에서 완도, 진도, 해남 등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고 영암에서 내려서 태백으로 가는 버스로 환승했다. 버스 의자에 앉자마자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차를 타기만 하면 잠이 오는 것은 일종의 멀미이다. 

 

광주로 올라갈 때는 마다리 차두와 책보에 싼 김치통을 앞자리에 놓고 제일 뒷자리로 간다. 대인동 터미널에서 내리지 않고 말바우 차고지까지 가서 내린다. 말바우 차고지에서 택시나 버스를 타면 자취방까지 훨씬 가깝기 때문이다. 

 

한번은 말바우에서 내려서 쌀푸대를 가지고 집에 갔는데 쌀은 없고 콩, 수수, 녹두, 팥, 참기름 등 수많은 농산물이 포장된 다른 사람의 푸대가 있었다. 양동이나 대인동에서 먼저 내린 사람이 보따리를 바꾸어 내린 것이다. 

 

기계공고를 다니는 것이 반은 자랑스럽고 반은 부끄러웠다.  인문계보다 성적은 좋았지만 실업계 다니는 것이 싫었다. 광주와 영암을 다니는 버스는 양동, 백운동, 남평, 금천, 나주, 영산포, 신북 등 동네마다 들렸다가 손님을 내리고 타기를 반복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대인동 터미널이 인산인해를 이뤄 무등경기장에서 버스가 출발했다. 넘어지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질서 통제하는 사람이 긴 장대를 좌우로 돌리면 앉아서 한발 한발 오리걸음으로 걸어가서 콩나물 같은 버스에 올라탔다. 이제는 볼 수 없는 지난 날의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