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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조선의 시인 9-10. 신흠(申欽)과 윤선도(尹善道)

조선의 시인9. 신흠(申欽) 
 
야언(野言) / 신흠(申欽)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늘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네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본질을 잃지 않고
버들은 백 번 꺾여도
새 가지를 피워내네  
 
신흠은 정2품 우참찬 신용(申瑛)의 손자이고 종7품 개성도 사 신승서(申承緖)의 아들이다. 신흠의 아들인 신익성은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남편이다. 신흠은 어려서 양친을 잃고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외할아버지 송인수에게 경서와 제자백가를 공부했다.  
 
신흠은 진사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여 정5품 지평(持平)으로 특진했다. 춘추 제씨전을 편찬한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신흠은 선조가 사망하며 영의정 유영경, 우의정 한은인, 평안도 관찰사 박동량, 경기도 관찰사 서성, 예조판서 허상, 대사헌 한준겸 등과 더불어 7명의 신하에게 유일한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아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흠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10년 동안 야인으로 생활했다. 다시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어 5년 만에 해배됐다. 인조반정으로 복위하여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신흠은 생전에 글재주가 뛰어나서 이정구 장류 이식과 함께 조선 중기 한문 4대가로 손꼽힌다. 또한 정철 박인로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4대 문장가로 꼽혔다. 상촌집 야언 황화집령 청창연담 구정록 등을 남겼고 인조 묘정에 배향됐다.  
 
"군자는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잘 분간해야 한다. 반드시 마땅히 말해야 할 때 말하고 마땅히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해야만 군자일 것이다" 라는 신흠(申欽)의 말씀을 위정자(爲政者)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조선의 시인 10. 윤선도(尹善道) 
 
오우가(五友歌) 월(月) / 윤선도(尹善道) 
 
구름 빛이 좋다 하나 검기를 자조한다
바람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좋고도 그칠 뉘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취니
밤중의 광명이 너만 한 것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오우가는 윤선도가 수(水) 석(石) 송(松) 죽(竹) 월(月) 등 다섯 벗을 노래했다. 국문학자 조윤제가 "시조가 이까지 오면 갈 곳까지 다 갔다는 감이 있다" 라고 극찬했다.  
 
윤선도(尹善道)는 한양 연화방 인근에서 종3품 예빈시부정 윤유심의 아들로 태어나서 종2품 강원도 관찰사 윤유기의 양자가 되어 전라도 해남으로 낙향하여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  
 
윤선도는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어 인목대비 폐비론 영창대군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간신 이이첨과 요부 김개시의 탄핵을 요구하다가 유배되었고 인조반정으로 해배되어 해남으로 낙향했다.  
 
윤선도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으나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다 해남으로 낙향했다.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노복을 이끌고 한양으로 가던 길에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뱃머리를 돌려 평생 은둔을 위해 제주도로 향했다.  
 
윤선도는 제주도로 가던 길에 보길도(甫吉島)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 이라 이름하고 정자를 세우고 은거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며 동남동녀를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함경도로 유배됐고 해배되자 보길도로 돌아왔다.  
 
윤선도는 효종의 부름을 받고 복직하여 예송논쟁으로 탄핵받아 유배됐고 석방되어 낙향하여 보길도에서 사망했다. 20년 동안 유배됐던 윤선도는 숙종이 즉위하여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영조의 특명으로 불천지위를 받았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6일의 달은 보름달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로부터 급전 직하 그믐달을 향해 치달으니 사람의 일도 늘 가득 찼을 때를 조심해야 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윤선도의 가르침을 잊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