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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고죽 ‘최경창’과 영암 ‘구림마을’

고죽 ‘최경창’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박순의 문인(門人)으로 문장과 학문에 능통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청백리 ‘최만리’의 5대손이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최수인’의 아들이다. 최경창이 어려서 영암에서 왜구에게 포위되자 퉁소를 구슬프게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함경도 북평사에 있을 때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관비(官婢)를 사랑하여 탄핵됐다. 

 


 황희, 맹사성, 박수량을 ‘조선의 3대 청백리’ 라고 하며 조선에는 200여 명의 청백리가 있었다. 최경창은 죽어서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청백리로 녹선됐다. 왕명에 따라 청렴하고 결백함이 뛰어난 관리를 청백리로 선정하여 표창했다. 살아있을 때엔 염근리라고 불렀다가 사후에는 청백리로 불렸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 송익필 등과 시를 주고받았고, 정철, 서익 등과 교류했다.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최경창은 백광훈, 이달과 함께 조선의 삼당시인으로 불렀다. 당시 사대부들은 오랫동안 권위와 규범의 논리에 치우치며 현실을 외면하는 시풍을 따랐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체험하고 주자학의 한계를 스스로 느꼈다. 삼당시인은 과거의 시풍을 과감하게 배격하고 암담한 현실을 비판하는 새로운 시풍을 만들었다. 옥봉 ‘백광훈’은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를 즐기며 시와 글로 명성을 얻었고‘옥봉집’을 남겼다. 손곡 ‘이달’은 허균과 허난설헌의 스승으로 벼슬을 거부하고 전국을 떠돌면서 시를 지었고 ‘손곡집’을 남겼다.

 


고죽 최경창, 기생 홍랑과 애절한 사랑 나눠


 홍랑은 조선시대 함경도 홍원의 여류시인이자 재색을 겸비한 경성 관아의 관기였다. 함경도 북평사로 부임해온 최경창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뜨거운 사랑으로 연결됐다. 하지만 최경창이 이듬해 부임지를 떠나면서 생이별을 하게 된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소서

간밤 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홍랑은 떠나가는 최경창에게 눈물로 애원했다.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고 나면 언제 돌아오리

함관령에 올라서 옛 노래를 부르지 마라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둡나니]

 

최경창은 남아있는 홍랑에게 눈물로 화답했다. 


 국법은 백성에게는 지엄하여 ‘양계의 금’은 함경도 백성들을 함관령 남쪽으로 넘어 갈 수 없게 했다. 국법을 따르자니 이별이고 국법을 어기자니 죽음이라 홍랑은 다음을 기약했다. 한양으로 돌아간 최경창이 앓게 되자 홍랑은 한양까지 달려가서 심신으로 간병하고 함경도로 돌아갔다. 유생들이 양반과 관비의 사랑을 상소하자 최경창은 파직되어 한직을 떠돌다가 45세에 객사했다. 홍랑은 묘지에 움막을 짓고 자신의 몸을 씻지 않고, 꾸미지도 않고 숯덩어리를 삼켜 벙어리가 되어 남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종적을 감췄다가 전쟁이 끝나자 최경창의 유작을 남긴 후에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홍랑이 목숨으로 지킨 유작은 고죽집이 되어 오늘까지 남아있다. 해주 최씨의 문중에서 의로운 홍랑을 기리며 최경창의 곁에 묻어 최씨 족보에 올리고, 시제를 지내고 있다. 살아서는 천민이지만 죽어서 양반이 된 사람은 홍랑 한 사람뿐이다. 

 


호남의 소금강 월출산 구림마을에 최경창의 흔적 남아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그 자락에 위치한 구림마을은 백제의 왕인박사, 통일신라의 도선국사, 고려의 최지몽, 조선의 최경창 등을 배출한 마을이다. 삼한시대부터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1,565년 창설된 구림 대동계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또한 1,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구림도기와 12개의 누정 그리고 수백 년이 넘은 고목나무 등이 즐비하게 옛 그대로 남아 있다. 영암 구림마을에 찾아가면 최경창과 홍랑의 애절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고죽관과 고죽시비를 만날 수 있다.


[버들 꺾어 천리길 떠나는 님에게 드리오니

나를 위해 앞뜰에 심어 두소서

하룻밤새 새잎이 돋아나거든

시름 어린 눈썹이 첩인 줄 아시어요]

 

고죽 최경창이 쓴 시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