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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영조의 탕평책

   노론은 서인 가운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장파로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주장한 강경파이다. 소론은 경신환국 이후 재집권한 서인 중에서 남인에 대한 강력한 탄압을 반대한 온건파이다.  
 
희빈장씨는 소론의 지원을 받아 왕후에 책봉됐고, 아들 경종이 임금이 되었다. 숙빈최씨는 노론의 지원을 받아 무수리에서 후궁까지 되어 아들 영조가 임금이 되었다. 영조는 즉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노론을 중심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무수리는 고려 및 조선 시대 궁중에서 청소 등을 비롯하여 세숫물 떠다드리기 등 허드렛일을 맡았었던 여자 종을 말이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최씨의 아들이라는 컴플렉스를 안고 태어났다.  
 
정성왕후 서씨는 제21대 국왕 영조의 정비이나 남편과의 불화로 소생은 없었다. 효장세자는 영조의 서장자로 생모는 후궁 정빈이씨이며 9세의 나이에 단명했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서차남으로 27세의 나이로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굶어 숨졌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적장남으로 정조의 동복형이며 정조가 태어난 해에 3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정조는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적장남으로 왕세손에 이어 24세에 왕통을 이었다.  
 
대리청정은 군주가 병이 들거나 나이가 들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후계자가 군주 대신 정사를 돌보는 것이다.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고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임오화변은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킨 뒤 뒤주에 8일간 가두고 굶겨 죽인 사건이다. 이방원이 이복동생 왕세자 이방과를 살해했다. 중종이 서장자 복성군을 살해했고, 광해군이 동복형제 임해군을 사사했다.  
 
벽파는 사도세자의 추숭에 반대하며 정조의 정책에 반대한 정파이다. 시파는 사도세자의 추숭에 찬성하며 정조의 정책에 찬성한 정파이다. 순조가 즉위하자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정정을 하였고 순조가 친정하자 시파인 김조순이 세도정치를 시작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탕평책이란, 영조 때와 정조 때 붕당의 대립을 막기 위해 골고루 인재를 등용한 정책이다. 

 

‘탕평’이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음을 뜻하는 ‘탕탕평평’에서 나온 말이다. ‘탕평(蕩平)’의 뜻은 인군(人君)의 정치가 편사(偏私)가 없고 아당(阿黨)이 없는 대공지정(大公至正)의 지경(皇極)에 이른 것을 의미한다.

 

선조말 동서분당 이후부터 시작된 당쟁은 왜란이 수습되면서 더욱 어지럽게 전개되어갔다. 파당간의 싸움에서 당론은 국가의 안위나 민생을 돌보는 정강(政綱)이나 정책이 아니었다.

 

몇 번의 사화를 거치며 훈구파에 밀려났던 사림파는 지방에서 다시 세력을 키워 정권을 잡은 뒤 붕당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붕당끼리 서로 존중하며 경쟁했지만, 조선 후기에는 대립이 극심해졌다. 

 

조선의 제21대 임금인 영조는 정치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이 붕당의 대립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막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다.

 

영조는 당시 대립하고 있던 노론과 소론을 화해시키고, 이에 반대하는 자들을 쫓아냈다. 중요한 관직에 노론과 소론을 골고루 등용했으며, 성균관에는 탕평비도 세웠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붕당 간의 대립은 계속 되었다. 소론 중 일부가 반란을 일으켰는가 하면, 붕당의 대립으로 인해 영조가 아들인 사도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영조의 뒤를 이어 정조도 탕평책을 펼쳤다. 자신이 생활하는 곳을 ‘탕탕평평실’이라 이름 짓고, 남인인 채제공을 영의정으로 삼았으며, 정약용 등 남인의 인재를 과감히 등용했다. 또 능력만 있으면 서얼에게도 관직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노론 · 소론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똑같이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영조의 탕평책과 정조의 탕평책은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은 붕당 간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는 타협을 중시했다. 그래서 온건파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렇지만 정조는 성리학의 원칙에 따라 옳고 그름을 따져 옳은 사람을 붕당의 구별 없이 중용했다. 그래서 강경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정이 운영되었다.

 

탕평정책은 전제왕조대에 격렬한 파당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전대보다는 발전된 정책운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척족 세력을 한 수단으로 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왕 자신이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였다.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고, 순조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렸다. 즉, 한 파당의 대립된 갈등을 근절하지 못했기에 후대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빌미를 마련해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