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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과 부통령 이시영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과 부통령 이시영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

박은식(朴殷植)은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박용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교유하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향시에 합격하여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를 모신 사당인 숭인전 능참봉으로 재직했다. 

 

 박은식은 불혹의 나이가 되자 주자학에 의구심을 갖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했다.  
 
 박은식은 장지연 신채호 남궁억 등과 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장지연과 공동 주필이 되어 애국적인 사설을 썼다. 황성신문은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항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정간당했고 이듬해 복간되었고 한일합방 조약으로 폐간되었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은식은 영국인 어니스트가 창간하여 조선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환됐다. 해방 이후 서울신문으로 개칭됐다.  
 
 박은식은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이 일본에 주권을 뺏기게 된 경과를 서술한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그에 맞선 저항에 관한 내용을 서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집필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하자 대통령 서리 겸 국무총리에 이어 2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1925년 ‘독립을 하려면 전족적으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됐다.  

 

●잊혀진 애국지사 부통령 이시영  

이시영의 부친 이유승(李裕承)은 이항복의 9대손으로 병과에 급제하여 정2품 이조판서와 종1품 우찬성을 역임했다. 을사늑약을 반대하고 국권 회복의 상소를 올렸다. 장남 이건영, 차남 이석영, 삼남 이철영, 사남 이회영, 오남 이시영, 육남 이호영 등을 낳았다.  

 

 

 이시영은 사마시에 급제하여 형조좌랑, 충청도순찰사, 평안남도관찰사, 한성재판소장 등을 역임했고 한성고등법원 판사로 재직 중에 경술국치를 당하자 사퇴했다.

일제로부터 조선총독부 부찬의에 임명됐으나 부임을 거부했다.  


한일합병 후 선생 형제 가족 50여명 가진 재산 처분…

독립군 기지 건설 위해 만주로 모두 망명

 
<우리 형제가 당당한 호족의 명문으로서 차라리 대의가 있는 곳에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차히 도모한다면 이는 어찌 짐승과 다르겠는가?> 라며 6형제는 독립운동을 위해 일가족 50인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이시영은 이유승의 오남이자 김홍집의 사위이다. 나라를 빼앗기자 만주로 망명하여 지린성에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4년 구속되어 출감했고, 1919년 베이징에서 3.1 운동에 활동했고,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시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재무총장, 감찰위원장, 국무위원 겸 법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임시정부가 일제에 쫓겨 창사, 광저우, 유주, 기강 등으로 이주할 때 생사를 함께하며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기초했다.  
 
 이시영은 해방이 되자 임정요인 환국 제1진에 참가하여 김구 김규식 등과 귀국하여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여 경희대학교를 설립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초대 부통령에 당선됐고,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이시영 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방위군 사건을 자행하자 실망감을 느끼고 사퇴했다. 2대 대선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이승만에게 패배했다. 1953년 ‘완전 통일의 그날을 못보고 눈감으니 통한스럽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장남 이건영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도중 병사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차남 이석영은 독립운동 도중 영양실조로 사망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삼남 이철영은 독립운동 도중 병사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사남 이회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육남 이호영은 항일단체인 다물단원으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행방불명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