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N 한국벤처연합뉴스 칼럼니스트 이상수 ㅣ
성공보다 귀한 것, 끝까지 부끄럽지 않다는 것
요즘 뉴스를 보면 묘한 공통점이 있다. 권력과 책임의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수사와 조사 대상이 되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비위와 일탈은 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거창한 범죄의 서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선택의 반복이다.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 “관행이니까”, “조직을 위해서”라는 말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이른다.
이 장면 앞에서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있다. 이령지혼(利令智昏). 이익은 지혜를 흐리게 만든다는 뜻이다. 인간은 이익 앞에서 언제든 판단력을 잃을 수 있다. 문제는 그 순간이 늘 극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대부분의 실패는 조용히, 그리고 합리화 속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흔히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성취, 지위, 성과는 분명 사회가 요구하는 가치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묻고 있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권좌에 올랐으나 고개를 들지 못하는 사람들, 성과를 남겼으나 이름 앞에 의혹이 따라붙는 사람들, 법적 처벌 이전에 이미 사회적 신뢰를 잃은 사람들을 보며, 성공의 정의는 다시 써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그래서 한 문장이 마음에 남는다.
“성공한 사람보다 끝까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더 귀하다.”
이 문장은 도덕적 수사가 아니다. 현실적인 조언이다.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잠시의 성과는 박수로 남지만, 부끄러움은 평생의 그림자로 따라다닌다. 특히 공적인 책임을 맡은 지도자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의 선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기준이 된다.
문제는 대부분의 잘못이 ‘큰 결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처음부터 법을 어기겠다고 마음먹는 사람은 드물다. 대신 작은 예외를 허용한다. 한 번의 편의, 한 번의 침묵, 한 번의 타협이 쌓이면서 어느새 경계선은 흐려진다. 그 지점에서 이익은 점점 커지고, 지혜는 점점 흐려진다. 이령지혼의 전형적인 경로다.
이 교훈은 젊은 세대에게도 유효하다. 오늘의 청년들은 경쟁과 성과의 압박 속에서 “결과만 남으면 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듣는다. 그러나 삶에는 결과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과정의 정직성이다. 편법으로 얻은 성과는 언젠가 그 대가를 요구한다. 빠른 길이 반드시 옳은 길은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걸리면 안 되는 일이 아니라, 애초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고. 확률의 문제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라고. 지금의 선택을 훗날 자녀와 제자 앞에서 설명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지도자에게도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오늘의 결정이 당장은 조직을 살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내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선택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법은 마지막 심판자이지만, 그 이전에 인간에게는 염치가 있다. 법망을 피해 갈 수는 있어도, 양심의 질문에서는 도망칠 수 없다.
결국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라, 조용히 지켜진 기준들이다. 박수받는 순간보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고개를 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개인의 삶도, 공동체의 운명도 그 질문 앞에서 갈린다.
성공은 순간일 수 있지만, 부끄러움은 오래간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 문장을 붙잡아야 한다. 성공한 사람보다 끝까지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더 귀하다. 이 단순한 문장이 오늘의 지도자에게는 경고가 되고, 내일의 지도자가 될 젊은이들에게는 나침반이 되기를 바란다. 사회가 이 기준을 다시 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