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굉필(金宏弼)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김종직의 제자이자 정여창의 동문이다. 유교의 수신서(修身書)인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처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서원 은행나무' (김굉필나무 수령400년, 보호수)](http://www.kjbn.kr/data/photos/20230937/art_16947792838697_e99c08.jpg)
김굉필은 제자 김굉필이 스승 김종직의 현실타협을 비판하여 결별했다. 김종직이 사망하자 김굉필이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수기(修己) 치인(治人)을 실천하며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계승했다.
김굉필은 연산군 때 조의제문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어 전라도 순천에 이배됐다 폐비윤씨 사건을 빌미로 일어난 갑자사화로 처형됐다 광해군 때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문묘에 종사됐다
정여창(鄭汝昌)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정육을은 의주판관으로 재직 중 이시애 난으로 피살됐다.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됐으나 고사하고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다.
![정여창 생가 (함양군 개평마을 일두고택)](http://www.kjbn.kr/data/photos/20230937/art_16947792845695_98754e.jpg)
정여창은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됐다. 54세의 나이에 유배지 종성에서 사망하여 경상도 함양군 승안산 기슭에 묻혔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다.
정여창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했다 중종반정 직후 복권됐고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됐다. 정여창은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오현으로 불린다 함양의 남계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등에 제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