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 ‘최경창’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박순의 문인(門人)으로 문장과 학문에 능통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청백리 ‘최만리’의 5대손이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최수인’의 아들이다. 최경창이 어려서 영암에서 왜구에게 포위되자 퉁소를 구슬프게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함경도 북평사에 있을 때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관비(官婢)를 사랑하여 탄핵됐다. 황희, 맹사성, 박수량을 ‘조선의 3대 청백리’ 라고 하며 조선에는 200여 명의 청백리가 있었다. 최경창은 죽어서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청백리로 녹선됐다. 왕명에 따라 청렴하고 결백함이 뛰어난 관리를 청백리로 선정하여 표창했다. 살아있을 때엔 염근리라고 불렀다가 사후에는 청백리로 불렸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 송익필 등과 시를 주고받았고, 정철, 서익 등과 교류했다.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최경창은 백광훈, 이달과 함께 조선의 삼당시인으로 불렀다. 당시 사대부들은 오랫동안 권위와 규범의 논리에 치우치며 현실을 외면하는 시풍을 따랐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최지몽(崔知夢, 907년~987년)은 전남 영암 구림 출신으로 63년간 여섯 임금을 섬긴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본명은 최총진(崔聰進)이며 해상무역을 통해 유력한 토착세력으로 성장한 최상흔(崔相昕)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상흔은 태조 왕건의 나주 정벌에 협력했고 아들 최지몽은 고려가 건국하자 벼슬을 얻었다. 최지몽은 불교경전 무량수경을 주석한 현일(玄一) 스님에게 경서와 사서를 익혔고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했고 경사(經史)에 통달했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삼한을 통일하고 다스릴 길몽이라고 꿈을 해몽하여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3년간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등 여섯 임금을 섬겨> 최지몽은 태조 왕건을 도와 새로운 왕조 ‘고려’를 개창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최지몽은 또 하늘의 별을 보고 “곧 변란이 있을 것이니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조언해 왕족 왕규(王規)가 일으킨 2대 임금 ‘혜종’ 시해 음모를 막아냈다. 혜종은 나주 출신 정화왕후 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건의 장남이다. 3대 임금 ‘정종’이 즉위하여 왕규(王規)를 처형하고 최지몽의 공로를 포상했다. 그러나,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1년~412년)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396년 백제를 공격하여 50여 개 성을 빼앗고, 왕족과 대신들을 잡아갔다. 백제 17대 아신왕(재위, 392년~405년)은 왜국의 힘을 빌려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태자 ‘전지(腆支)’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신라 19대 내물왕(재위, 356년~402년)은 왜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왕자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왜국은 백제와 신라에 양다리 외교를 하였다. 402년 백제는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크게 환대했다. 403년 백제는 왜국에 아직기(阿直岐, 생몰년 미상)를 말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했다. 아직기는 경서에 능하여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백제의 훌륭한 학자인 왕인을 왜왕에게 추천했다. 태자 전지(腆支)는 아버지 아신왕이 사망하자 왜왕에게 백제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18대 전지왕(재위, 405년~420년)으로 즉위했다. 일본에서 학문의 시조이자 아스카 문화의 원조로 추앙받아 왕인(王仁, 생몰년 미상)은 백제시대 영암 출신의 학자다. 405년 왜왕의 초빙으로 도공, 야공, 와공 등을 데리고 유교경전인 논어(論語) 10권, 기초한자인 천자문(千字文) 1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구름 위를 나는 새도 돌아오는 집’. 운조루(雲鳥樓)는 운조루(雲鳥樓)는 류이주(柳爾胄, 1726년∼1797년)가 1776년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명당에 건축한 목조 기와집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이다. 류이주는 조선 후기 무신이자 건축가로 경상도 대구에서 태어나서 17세에 한양으로 올라가서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홍봉한의 천거로 관직에 등용되어 전라도 낙안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류이주는 정조가 즉위하자 정3품 오위장에 복직하여 함흥성과 수원성을 쌓았고 평안도 용천부사와 함경도 삼수부사를 역임했고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류이주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낙안군수 당시 보아두었던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로 내려와서 은거했다. <류이주,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에 ‘운조루’ 지어> 운조루는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금환락지는 선녀가 땅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국을 뜻한다. ‘운조루’는 송나라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차운했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박상희 박상희(朴相熙)는 1905년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가족들은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로 이사했다. 구미보통학교 졸업했고 대구사범고등학교에 낙방했다. 박성빈은 몰락 양반가 출신으로 정9품 효력부위(効力副尉)를 지냈고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처형 직전에 사면됐다. 백남의는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었다. 박성빈과 백남의는 박상희와 박정희의 부모이다. 박상희는 선산청년동맹의 준비위원 상무위원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해 결성한 신간회(新幹會) 간부로 항일활동에 앞장섰다,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의 대구지국장과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등으로 활동했다. 박상희는 황태성과 함께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건국동맹 (朝鮮建國同盟)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했고 인민위원회 구미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했다. 박상희는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
면앙정 송순(宋純, 1493년 성종 24년∼1583년 선조 16년)은 담양에서 태어나서 호남 사림의 중조인 눌재 박상(朴祥, 1474~1530), 육봉 박우(朴祐, 1476~1546, 사암 박순의 아버지) 형제에게 학문을 배웠다. 종9품으로 출사하여 50년 만에 정2품까지 승진했다. 교우로는 성수침(成守琛, 1493~1564, 우계 성혼의 아버지), 이황(李滉, 1501~1570), 양산보(梁山甫, 1503~1557, 담양 소쇄원을 조성한 이) 등이 있었고 문인(門人)으로는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송강 정철(1536~1593), 백호 임제(1549~1587) 등이 있었다. 중종의 장인인 외척 김안로가 권력을 잡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연을 벗삼아 담양에서 4년간을 지냈다. 김안로가 탄핵을 받아 사사되자 송순은 경상도 관찰사로 복직했다. 중종의 처남인 외척 윤원형이 권력을 전횡하여 송순은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복직했다. 송순은 77세에 정2품 의정부 우참찬으로 승진하자 벼슬을 사양하며 다시 담양으로 낙향했다. 성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워 주변에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박열 박열(朴烈)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박영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함창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했다. 박열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서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수학했다.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즘단체인 흑도회(黑濤會)에서 활동했다. 또한 비밀결사조직인 의열단에 가입하고 비빌결사조직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박열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됐다. '일본인 부인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히로히토 황태자의 혼례식을 기하여 다이쇼 천황과 히로히토 황태자 등을 폭탄으로 암살하기로 모의했다' 라는 이유로 구속됐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사형 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박열은 일본이 패망하자 22년 2개월 만에 석방됐다. 박열은 1946년 김구의 부탁으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 유해발굴 봉환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이승만과 면담하고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 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재일본 대한
우리나라 산림은 2~30㎝이상 쌓여 있는 낙엽들로 인하여 쉽게 발화되어 광범위한 지역에 큰 재난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건조한 계절이 오면 산림부서 공무원들은 산불조심기간 비상근무에 돌입한다. 이 기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산불예방 및 산불 진압을 위해 상황실에 상주하며,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 산림청에서는 산불재난으로부터 산림과 삶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해 산림부서 공무원 외에도 산불전문 인력을 편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특히 봄, 가을철과 같은 산불 다발 시기에는 산불감시 인력을 집중 배치하여 산불 감시 및 초기진압에 힘을 쓴다. 또한 군, 경, 소방서, 산림항공본부 등의 유관기관과 협력하여 철저한 재난 대응을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최근 산림 주변 개발, 독가촌 및, 귀촌 인구 등의 증가로 과거에 비해 산불 발생 위험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3~2023.11.) 발생한 산불은 5,368건(35,597ha)이다. 나무를 심고 울창한 숲으로 가꾸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산불로 인해 잿더미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산불은 일단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고 다시 원상태로 복원하는 데에도 수십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이회영 이회영(李會榮)은 이항복의 후손으로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과 동래정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승은 첫째 이건영, 둘째 이석영, 셋째 이철영, 넷째 이희영, 다섯째 이시영 등을 낳았다. 이회영은 한학을 배웠으나 감리교로 개종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 노비해방과 적서타파 여성의 부당한 인습반대, 개가와 재혼을 허용 등을 주장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인영 기산도 등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다 실패했다. 이회영은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했다. 안창호 신채호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고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회영 일가는 당시 소 13,000마리 값으로 현재 시가로 600억 원 정도를 가지고 간도에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 이회영은 내분으로 분열된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상하이에서 유자명 백정기 등과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과 흑색공
클레오파트라(Cleopatra) 7세는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 기원전 51년에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망하자 이집트의 당시 전통인 근친 결혼에 따라 18세 나이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혼인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이자 마지막 파라오(Pharaoh)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큰 야심을 가진 정치가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그리스어만 사용했던 반면, 토착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였으며, 정치 수완도 뛰어나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휘어잡는 한편, 토착 이집트 백성들로부터도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공화정의 내전으로 이집트로 도피한 집정관 폼페이우스를 암살했다.클레오파트라는 단독 여왕의 자리를 노리다가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의해 직위를 빼앗기고 이집트에서 추방됐다. 기원전 47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로마공화정의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받기 위해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자겸은 정2품 상서좌복야 (尙書左僕射) 이호와 통의국대부인 (通義國大夫人)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부인 최씨는 종1품 시중(侍中) 최사추의 딸이었다. 조부 이자연은 종1품 중서령(中書令)을 지냈고 외조부 김정준은 정2품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이자겸은 16대 임금 예종의 장인이 되어 음서로 벼슬을 시작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결국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이자 겹장인까지 되어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칭하며 온갖 전횡을 일삼았다.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이자겸의 난’ 일으켜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진족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고려를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을 믿고 인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하였다. 인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자겸이 왕궁을 불사르고 인종을 유폐시키고 국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하지만 왕족 이수와 귀족 김부식이 ‘이자겸의 난’을
버림받은 독립운동가3.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은 김알렉산드라라 부르며 19세기 후반 대흉년으로 연해주로 이주한 김두서의 딸로 1885년 연해주 시넬니코보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이 되었다. 김알렉산드라의 아버지 김두서는 표트르 세묘노비치로 개명했고 러시아와 청나라를 연결하는 동청철도 공사 통역관으로 만주로 차출되어 급사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친구인 스탄케비치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양아버지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술과 도박에 찌든 남편과 이혼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한국계 중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인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김알렉산드라는 극동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김립 이동휘와 함께 한국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이자 '반일(反日), 반제(日帝)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령으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대항했다. 한인사회당은 출판사를 설립하여 한국의 역사 지리 등 교과서를 간행했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하자 조선인 적위대를 구성해 반일 항쟁에 돌입했다. 김알렉산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