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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구례 운조루의 타인능해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구름 위를 나는 새도 돌아오는 집’. 운조루(雲鳥樓)는 운조루(雲鳥樓)는 류이주(柳爾胄, 1726년∼1797년)가 1776년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명당에 건축한 목조 기와집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이다.  

 

류이주는 조선 후기 무신이자 건축가로 경상도 대구에서 태어나서 17세에 한양으로 올라가서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홍봉한의 천거로 관직에 등용되어 전라도 낙안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류이주는 정조가 즉위하자 정3품 오위장에 복직하여 함흥성과 수원성을 쌓았고 평안도 용천부사와 함경도 삼수부사를 역임했고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류이주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낙안군수 당시 보아두었던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로 내려와서 은거했다. 

 

 

<류이주,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에 ‘운조루’ 지어>

 

운조루는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금환락지는 선녀가 땅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국을 뜻한다. 

 

‘운조루’는 송나라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차운했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봉우리를 돌아나오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날다 지친 새들은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1793년에 류이주가 두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기 위해 작성한 ‘장자구처기(長子區處記)’와 1800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구례오미동가도(全羅求禮五美洞家圖)'에서 운조루가 지어질 당시의 규모와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사당, 안채, 사랑채, 행랑채, 제실 등 78칸으로 표기했으나 실제로는 아흔아홉 칸으로 지어졌고 현재 73칸이 남아있다.

 

 

<운조루에서 ‘타인능해(他人能解)’ 베풂의 품격을 배워야>   

 

운조루 주인들은 대대로 가난한 이웃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든 뒤주를 열어서 쌀을 꺼내가 끼니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쌀 2가마가 들어가는 나무 뒤주 아랫부분에는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와서 마음 놓고 가져갈 수 있다는 뜻으로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새겨놓았다. 또한 운조루에는 배고픈 사람들을 배려하기 위해 밥 짓는 냄새가 담장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굴뚝을 낮게 만들었다고 한다. 

 

운조루에는 타인능해의 나눔과 베풂의 정신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운조루의 주인들은 일제 강점기에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 240년 동안 전통을 지켰다. 운조루는 바로 그 나눔의 정신 때문에 동학혁명 때도, 일제강점기 때도, 여순사건 때도, 한국전쟁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전라도 구례 운조루는 경상도 경주의 최부잣집과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