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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6) 덩샤오핑과 흑묘백묘론

덩샤오핑과 흑묘백묘론

덩샤오핑과 흑묘백묘론

 

대약진운동은 마오쩌둥(毛澤東)이 근대적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추진한 경제성장 정책이다. 마오쩌둥은 인간의 노동력으로 농업과 공업이 발전될 수 있다며, 인민공사를 창설하고 철강사업과 같은 노동력 집중산업을 독려하는 대중적 경제부흥운동을 추진하였다. 대약진이라는 말은 <인민일보>의 1957년 11월 13일자 사론인 '전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에서 비롯되었다.

 

이와 같은 구호 아래 중국 내부적으로 7년에 영국을, 8년 혹은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공업생산의 지표를 높였다. 그 결과 급격한 공업노동력 수요로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강제로 착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필수품의 공급부족이 일어났으며 노동력을 잃은 농촌의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농업경제의 파탄을 가져왔다.

이로 인한 농업생산량의 부족에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과 구 소련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경제원조 중단의 계속으로 인하여 수천만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악재들이 산재한 가운데 기술 개발을 병행하지 않고 노동력 집중만으로 과다하게 부흥시킨 중화학공업은 처음 설정한 경제지표에 못 미치는 성장결과를 보이면서 대약진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마오쩌둥이 참새는 해로운 새라고 하자 참새를 잡아 개체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해충이 창궐하여 대흉년이 들었다. 2,500만 명이 굶주림으로 사망하자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선언하고 국가주석을 사임했다.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에 실패한 마오쩌둥을 비판하며 권력을 장악했으나 곧 실각하게 된다. 권력에서 물러나 있던 마오쩌둥이 풀로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며 자본주의 봉건주의 관료주의 등의 제거를 주창하였으며, 문화대혁명으로 홍위병을 규합하여 권력의 핵심으로 다시 재기했다. 문화대혁명은 자본주의 봉건주의 관료주의 등을 척결하기 위해 급진적인 사상투쟁이다.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이 실패하여 몰락했다가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서 재기에 성공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4인방(마오쩌둥의 4번째 부인인 장칭을 비롯한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은 체포되어 몰락했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권력을 장악하고, 흰 고양이건 검은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흑묘백묘론을 주장했다. 흑묘백묘론은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덩샤오핑의 이론이다. 인민들을 잘 살게하고,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 자본주의적 요소도 과감히 도입할 수 있다며 개방정책을 추진했다.

덩샤오핑은 프랑스와 소련 유학을 다녀와서 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하였고, 대장정과 국공내전에 참가했다.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을 비난하다가 실각했고, 문화대혁명으로 박해를 받았고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복귀했다.

 

덩샤오핑은 1989년까지 중국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정치는 사회주의를 경제는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했다. 덩샤오핑은 UN의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대만을 대신하여 중국을 유일한 합법정부로 정식으로 공인을 받았다. 영국과 홍콩에 대한 50년 동안 1국 2체제를 핵심으로 하는 중영공동선언을 채택하여 1997년 홍콩을 반환받았다.

 

 

덩샤오핑은 1989년 서방의 지원을 받은 반체제 세력이 일으킨 민주화 요구 시위를 유혈진압을 하였다. 덩샤오핑은 시신을 화장하라고 유언하고 1997년 사망하여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