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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악시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오는 님이면 이마음도 보낼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1935년 조선일보의 민족문화 말살에 대응하며 조국애를 담은 애향가 현상모집에 20대 무명 시인 문일석의 목포의 사랑’이 당선됐다. 오케레코드사가 ‘목포의 눈물’로 제목을 바꾸고 손목인이 곡을 붙였다. 신인가수 이난영이 노래하여 한국에서 불멸의 명곡이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들의 슬픔과 울분을 달래주는 노래가 되었고 일본인들의 사랑까지 받았다. 


= 조선 총독부에서 2절 가사가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를 문제 삼아 불온한 기운이 있다며 금지곡 지정처분을 내렸다.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당시 ‘노적봉’에 이엉을 덮어 수백 만석의 쌀가마니를 쌓아둔 것처럼 위장하고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쌀뜨물처럼 속였다는 전설이 있다. 결국 세 그루의 동백이 있는 연못에 평안히 부는 바람이라는 뜻으로 ‘삼백년 원한품’을 ‘三栢淵 願安風’으로 가사를 바꾸어 금지곡에서 해제됐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의 대표곡이자 목포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전라도의 두 번째 애국가가 되어 대통령 선거와 해태가 야구에서 패배하면 불렀고 승리하면 불렀다.


   이난영은 목포공립 보통학교를 가난으로 자퇴했다. 삼천가극단의 막간가수로, 태양극단의 단역가수로 노래를 불렀다. 남도판소리 가락에 흐느끼는 비음으로 ‘목포의 눈물’을 불러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었다. 1968년 한국 최초로 개인을 추모하는 ‘난영가요제’가 개최됐다. 1969년 한국 최초의 노래비인 ‘목포의 눈물비’가 목포의 유달산 중턱에 세워졌다. 가수 이난영은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 반야월과 더불어 ‘한국 가요계의 3대 보물’로 부르고 있다. 


   김해송은 가수겸 작곡가로 ‘항구의 서정’을 불렀고 ‘오빠는 풍각쟁이’를 작곡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 때 ‘이천오백만 감격’ 등 친일가요를 작곡했고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사망했다. 이난영은 다시 남인수와 세기적 로맨스를 남겼다.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 많은 인기를 받았으나 ‘혈서지원’ 등 친일가요를 불렀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1,000여 곡을 노래를 부르고 44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불러 스타가 됐고, 남인수는 애수의 소야곡을 불러 스타가 됐다. 남인수는 이난영을 사랑했고, 이난영을 김해송과 결혼했다. 이난영의 결혼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편 김해송이 실종되자 끝이 났고, 남인수의 사랑 없는 결혼도 이혼으로 인해 끝이 났다. 홀어미가 된 이난영과 홀아비가 된 남인수는 불나비 같은 사랑을 불태우다가 사라졌다.] 1969년 개봉된 이난영과 남인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이 강산 낙화유수’의 줄거리다. ‘이강산 낙화유수’ 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사랑은 떨어지는 꽃은 물에 흘러갔다.

 

   [영산강 안개속애 기적이 울고 삼학도 등대 아래 갈매기 우는 그리운 내 고향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항구다 똑딱선 운다] 이난영의 노래처럼 ‘목포는 항구다’ 목포는 눈물이고 애달프다.  

 

글. 서일환(언론학 박사, 역사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