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산림은 2~30㎝이상 쌓여 있는 낙엽들로 인하여 쉽게 발화되어 광범위한 지역에 큰 재난을 가져올 수 있다. 이렇게 건조한 계절이 오면 산림부서 공무원들은 산불조심기간 비상근무에 돌입한다. 이 기간 동안 각자의 자리에서 산불예방 및 산불 진압을 위해 상황실에 상주하며, 언제든 출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한다. 산림청에서는 산불재난으로부터 산림과 삶의 터전을 지켜내기 위해 산림부서 공무원 외에도 산불전문 인력을 편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특히 봄, 가을철과 같은 산불 다발 시기에는 산불감시 인력을 집중 배치하여 산불 감시 및 초기진압에 힘을 쓴다. 또한 군, 경, 소방서, 산림항공본부 등의 유관기관과 협력하여 철저한 재난 대응을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최근 산림 주변 개발, 독가촌 및, 귀촌 인구 등의 증가로 과거에 비해 산불 발생 위험이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최근 10년간(2013~2023.11.) 발생한 산불은 5,368건(35,597ha)이다. 나무를 심고 울창한 숲으로 가꾸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산불로 인해 잿더미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산불은 일단 발생하면 되돌릴 수 없고 다시 원상태로 복원하는 데에도 수십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이회영 이회영(李會榮)은 이항복의 후손으로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과 동래정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승은 첫째 이건영, 둘째 이석영, 셋째 이철영, 넷째 이희영, 다섯째 이시영 등을 낳았다. 이회영은 한학을 배웠으나 감리교로 개종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 노비해방과 적서타파 여성의 부당한 인습반대, 개가와 재혼을 허용 등을 주장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인영 기산도 등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다 실패했다. 이회영은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했다. 안창호 신채호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고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회영 일가는 당시 소 13,000마리 값으로 현재 시가로 600억 원 정도를 가지고 간도에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 이회영은 내분으로 분열된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상하이에서 유자명 백정기 등과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과 흑색공
클레오파트라(Cleopatra) 7세는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에 태어났다. 기원전 51년에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사망하자 이집트의 당시 전통인 근친 결혼에 따라 18세 나이에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혼인하여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왕이자 마지막 파라오(Pharaoh)가 되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큰 야심을 가진 정치가였다. 권력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능력도 출중했다. 이전까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이집트어 배우기를 거부하고 그리스어만 사용했던 반면, 토착 이집트어를 배운 최초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파라오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여 통역이 필요없을 정도였으며, 정치 수완도 뛰어나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휘어잡는 한편, 토착 이집트 백성들로부터도 인기를 모았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로마공화정의 내전으로 이집트로 도피한 집정관 폼페이우스를 암살했다.클레오파트라는 단독 여왕의 자리를 노리다가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 의해 직위를 빼앗기고 이집트에서 추방됐다. 기원전 47년에 이집트를 방문한 로마공화정의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보장받기 위해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자겸은 정2품 상서좌복야 (尙書左僕射) 이호와 통의국대부인 (通義國大夫人)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고 부인 최씨는 종1품 시중(侍中) 최사추의 딸이었다. 조부 이자연은 종1품 중서령(中書令)을 지냈고 외조부 김정준은 정2품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이자겸은 16대 임금 예종의 장인이 되어 음서로 벼슬을 시작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결국 이자겸은 인종의 외조부이자 겹장인까지 되어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으로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칭하며 온갖 전횡을 일삼았다.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 이씨가 왕이 된다는 도참설을 믿고 ‘이자겸의 난’ 일으켜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진족 금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고려를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또한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득국(十八子得國)'을 믿고 인종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 하였다. 인종은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자겸이 왕궁을 불사르고 인종을 유폐시키고 국사를 마음대로 처리했다. 하지만 왕족 이수와 귀족 김부식이 ‘이자겸의 난’을
버림받은 독립운동가3. 볼셰비키 김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은 김알렉산드라라 부르며 19세기 후반 대흉년으로 연해주로 이주한 김두서의 딸로 1885년 연해주 시넬니코보에서 태어났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원이 되었다. 김알렉산드라의 아버지 김두서는 표트르 세묘노비치로 개명했고 러시아와 청나라를 연결하는 동청철도 공사 통역관으로 만주로 차출되어 급사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친구인 스탄케비치에게 입양되어 성장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양아버지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혼인했으나 술과 도박에 찌든 남편과 이혼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한국계 중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인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김알렉산드라는 극동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김립 이동휘와 함께 한국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이자 '반일(反日), 반제(日帝)의 사회주의 노선'을 강령으로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대항했다. 한인사회당은 출판사를 설립하여 한국의 역사 지리 등 교과서를 간행했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하자 조선인 적위대를 구성해 반일 항쟁에 돌입했다. 김알렉산드
김희정 작가/박사 인터뷰 특별 초대석 김희정 작가 인터뷰 구일암 발행인 김희정 작가는 상담학 박사로서 “못다 핀 꽃망울들에게”라는 저서를 출판하여 인터뷰를 하게되었다. ◆김희정 상담학박사 프로필 아래와 같다. - 아름다운동행 상담센터 소장 - 서울관악가족상담센터 센터장 - 국제공인이마고부부치료사 (CIT) - 국제공인이마고워크샵프리젠터 (CWP) - 한국상담학회 전문영역 슈퍼바이저 - 한국부부가족상담협회 가족상담 수련감독 - 한국부부가족상담협회 부부상담 수련감독- 한국부부상담연구소 부부치료 이론 및 실제 강사 - 서울가정법원 후견감독심리상담위원 - 의정부 지방법원 소송이혼 상담위원 - 한국에니어그램학회 이사 - 한국상담심리학회 정회원 - 내면아이, 이마고 부부관계치료에 능통한 상담전문가. - K-뉴스그룹 중소벤처뉴스/TV 칼럼리스트 ◆이번 10월에 출간한 저서 [못다 핀 꽃망울들에게] <김희정 작가> 의 생각 길을 걷다 임산부를 만나게 되면 잠시 가던 길 멈추고 충분히 좋은 양육자 되도록 기도한 후 발걸음을 재촉한다.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그 자녀의 인생이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자녀에게 충분히 좋은 양육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1) 봉오동전투 홍범도 홍범도(洪範圖)는 홍경래의 친족으로 증조부 홍이팔은 처형됐고 가문은 멸족이 되었다. 할아버지 홍동철이 구사일생으로 평양으로 은신하여 살아났다. 어머니는 홍범도를 낳고 사망했고 아버지는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홍범도는 머슴살이를 하다가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군인이 되었다. 22세에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를 하였으나 비구니 단양이씨와 열애 끝에 환속하고 북청에서 사냥꾼이 되었다.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에 참여했다.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자 저항했다. 홍범도의 부인 단양이씨는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했고 아들 홍양순은 일제와 싸우다 전사했다. 홍범도는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계속했다. 홍범도는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백두산 일대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사령관이 되어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습격했다. 대한독립군을 대한북로독군부로 개편했다. 1920년 6월 홍범도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했다. 일본군 정규군 157명의 사망자와
조선의 시인 11. 김득신(金得臣) 공산도중 하제후작(公山途中 下第後作) / 김득신(金得臣) 올해에도 실의하니 나그네 마음은 쓸쓸하여 외로운 여관에서 밤새도록 잠 못 이루네 용악의 짙은 구름 푸른 산빛 덮어 버리고 금강의 거센 물결 차가운 소리로 울부짖네 온갖 마귀 장난인지 나의 운명 궁박하고 모든 일 어그러지니 내 인생 한스럽네 북쪽 향해 고향으로 눈길만 보내니 저물녘 비바람에 돌아갈 길 어둡구나 김득신(金得臣)은 충청도 공주에서 열린 향시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고향인 충청도 목천으로 가면서 속상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 과거시험에 이건창은 15세에 급제했고 김득신은 59세에 급제했다. 김득신은 김시민(金時敏)의 손자이며 김치(金緻)의 아들이다 10세에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고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기억력이 좋지 않았고 총명하지 못했다 심지어 몇 시간 전에 공부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둔치였다 김시민은 진주목사로 재직 중에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봉해졌고 영의정에 추증됐다. 김치는 김시회의 아들이자 김시민의 양자이며 김득신의 생부이고 인조반정으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광주 송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 바로바로 떡갈비 “떡갈비”하면 광주에서 제일 유명한 맛집 “광주 송정 종가집 떡갈비”를 소개한다. 본 언론사 구일암 발행인은 본 언론사가 선정한 맛집 광주 송정 종가집 떡갈비 박영옥 대표를 만났다. 광주 송정 종가집 떡갈비는 광주 광산구 광산로19번길 26 동백빌딩 1층에 있다. <약도 보기> https://naver.me/F8niKQBM <광주 송정종가집 떡갈비 예약문의> HP-010-2616-0753 광주 송정 종가집 떡갈비 역사는 올해로 13년째 운영하고 있는 광주에 "떡갈비의 명소 맛집"이다. 2022년 광주광역시에서 “맛집”으로 선정된 떡갈비의 명소이다. 광주 송정역에 하차하여 광산구청 쪽으로 큰길을 따라 이동하면 광산구청을 미쳐 못가 오른쪽에 있다. 종가집 떡갈비는 전용 주차장도 있고 앞에 공영주차장도 주차할 수 있어서 편하게 주차를 할 수도 있다. 이곳은 명성이 있는 맛집으로 예약하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맛집으로 선정된 이유가 따로 있다. 음식을 만들 때 가족과 소중한 분에게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소중하게 정성을 다한다. 음식도 다양하다.
조선의 시인9. 신흠(申欽) 야언(野言) / 신흠(申欽)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늘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네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본질을 잃지 않고 버들은 백 번 꺾여도 새 가지를 피워내네 신흠은 정2품 우참찬 신용(申瑛)의 손자이고 종7품 개성도 사 신승서(申承緖)의 아들이다. 신흠의 아들인 신익성은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남편이다. 신흠은 어려서 양친을 잃고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외할아버지 송인수에게 경서와 제자백가를 공부했다. 신흠은 진사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여 정5품 지평(持平)으로 특진했다. 춘추 제씨전을 편찬한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신흠은 선조가 사망하며 영의정 유영경, 우의정 한은인, 평안도 관찰사 박동량, 경기도 관찰사 서성, 예조판서 허상, 대사헌 한준겸 등과 더불어 7명의 신하에게 유일한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아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흠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10년 동안 야인으로 생활했다. 다시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어 5년 만에 해배됐
안녕하십니까. 드림 솔루션 대표 조중희 입니다. 요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의 경제적인 불안은 고물가, 고유가, 고금리-3고로 인하여 건국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사에서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기업토탈경영 솔루션을 진행하여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 행복을 함께만들어 드리는 회사입니다. 요즘 기업들이 재정상의 이유와 인력운영상의 이유로 많이 도산되고 있습니다. 정부기관에서는 많은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정보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중소기업대표님들께서는 해당정보를 어떻게 어디서 알고,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잘 모르십니다. 회사는 예산관리, 마케팅관리, 시스템운영, 이 세가지를 잘 관리 해야지만 성장하고 잘 운영이 된다고 합니다. 자사는 통합적인 경영에 대한 정보제공 및 지도와 참여를 통해, 기업대표님들을 도움드리고 있습니다. 단일화된 세무와 노무에 대해서만 컨설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님들의 시각에서 주기적으로 어떻게 업무를 진행되어야 할지, 재무와 운영의 시각으로 도움 드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업무범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기업통합컨설팅 2. 기업세무
조선의 시인7. 송익필 山行 (산행) / 宋翼弼 (송익필) 산행 중에는 앉는 것을 잊고 앉으면 가는 것도 잊고 말을 소나무 그늘 아래 쉬게 하고 물소리를 듣네 내 뒤에 오던 몇 사람이나 나를 앞서가는가 각자 그리 그칠 데로 돌아가는데 또 무엇을 다투리 송사련은 좌의정 안당이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키고 재산과 노비를 차지했다. 정3품 절충장군 등을 역임하며 30년 동안 권세를 누렸다. 신사무옥이 무고로 밝혀지자 관직이 삭탈됐고 서얼로 환천됐다. 송익필은 송사련의 서자로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송사련의 무고죄 때문에 독학으로 성리학을 수학했다. 25세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얼손(孼孫)이 과거시험을 봤다’ 라는 상소를 받아 합격 자격이 박탈됐고 서얼로 환천됐다. 송익필은 벼슬을 단념하고 고양 구봉산에서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단념하며 이이 성혼 정철 조헌 등과 교우했다. 해동 18현인 김장생, 문묘와 종묘에 종사 된 김집, 인조반정 공신인 김유,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 등을 양성했다. 송익필은 서인에 속했고 문장에 능해 이율곡, 최립, 하응림, 최경창, 이달, 백광훈,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가로 꼽혔다. 송익필은 정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