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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아나키스트 이회영

 

이회영(李會榮)은 이항복의 후손으로 한성부의 저동(苧洞)에서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과 동래정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승은 첫째 이건영, 둘째 이석영, 셋째 이철영, 넷째 이희영, 다섯째 이시영 등을 낳았다. 

 

이회영은 한학을 배웠으나 감리교로 개종하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했다. 노비해방과 적서타파 여성의 부당한 인습반대, 개가와 재혼을 허용 등을 주장했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나인영 기산도 등과 함께 을사오적 암살을 모의하다 실패했다.

 

이회영은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 기지를 설립할 구상했다. 안창호 신채호 등과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新民會)를 결성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내에 있던 재산은 처분하고 60명에 달하는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이회영 일가는 당시 소 13,000마리 값으로 현재 시가로 600억 원 정도를 가지고 간도에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기반을 닦았다.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다.

 

이회영은 내분으로 분열된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상하이에서 유자명 백정기 등과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과 흑색공포단(BTP)을 창립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32년 다롄 항구에서 65세의 나이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으로 옥사했다.

 

장남 이건영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도중 병사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차남 이석영은 독립운동 도중 영양실조로 사망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삼남 이철영은 독립운동 도중 병사하여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사남 이회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육남 이호영은 항일단체인 다물단원으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행방불명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다섯째 이시영만 해방이 되어 살아서 귀국하여 초대 부통령이 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방위군 사건을 자행하자 실망감을 느끼고 사퇴했다. 이회영은 1962년 박정희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이동휘(李東輝)는 함경북도 단천에서 아전 이승교의 아들로 태어났다. 군수의 시중을 드는 통인으로 있다가 보성전문학교의 설립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용익의 추천으로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에서 수학한 뒤 육군 참령을 역임했다.

 

이동휘는 안창호 등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어 석방되자 보창학교를 건립하고 대한자강회를 결성하는 등 애국계몽 운동에 노력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 당시 의병을 일으키다가 체포되어 유배됐다.

 

이동휘는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권업회(勸業會)에 가담하여 독립전쟁을 계획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인으로 두 번째로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독일의 밀정으로 오인 받아 체포됐으나 김알렉산드라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이동휘는 김알렉산드라와 더불어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활동하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노선 차이로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고려공산당을 창립했다.

 

이동휘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자 시베리아에서 여생을 보냈다. 1935년 감옥에 투옥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가 6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됐고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 조명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