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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해동18현 이황(李滉)

 

이황(李滉)은 경상도 안동부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21세에 초취 허씨와 결혼하여 27세에 상처했고 31세에 재취 권씨와 재혼하여 47세에 사별했다.  
 

권주(權柱)는 경상감사로 재직 중 폐비윤씨에 사약을 전달한 죄목으로 교살됐고 부인은 관노가 되었다. 아들 권질(權礩)은 연산군을 비방하여 유배되어 중종반정으로 해배됐고 기묘사화로 유배됐다. 이황은 정신이 혼미한 권질의 딸과 재혼했다.  
 
이황은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김인후와 교유하며 성리학을 수학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고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송나라의 주자의 문서인 주자대전을 연구하여 '동방의 주자'로 불렸다.  
 
이황은 충청도 단양군수로 재직 중에 형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이해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고 무고사건에 연좌되어 귀양 도중 병사했다.  
 
48세 이황은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18세 기녀 두향을 만나 낮 퇴계랑 밤 퇴계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두향은 풍기로 떠나는 이황에게 매화를 주었다. 퇴계는 매화에 물을 주라고 유언했고 두향은 남한강에 몸을 던졌다.  
 

 

이황은 명종으로부터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만들었다. 이황은 병을 핑계로 출사와 사퇴를 반복하며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이황은 이언적의 주리설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종주가 되었고 동서분당으로 동인의 영수가 되었다. 동인은 이황을 추종하는 남인과 조식을 추종하는 북인으로 분화됐다. "경상좌도에는 퇴계 이황이 있고 우도에는 남명 조식이 있다"라고 하였다.  
 
58세의 대사성 이황은 리(理)와 기(氣)의 따로 있음을 주장했고 32세의 신출내기 기대승이 이(理)와 기(氣)가 함께 있음을 주장했다. 경상도 안동과 전라도 장성을 오가는 편지로 13년 동안 사단칠정논변 논쟁하여 이황은 기대승의 견해를 수용했다.  
 
이황은 논이 1800 마지기에 노비가 250여 명을 거느린 부유한 재력가였으나 경제적 곤궁함을 토로했다. 양명학을 '사문(斯文)의 화'라고 비판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약탈된 저서와 작품은 일본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정승 10여 명과 판서 30여 명이 배출했다. 70세의 나이에 작은 비석이나 하나 세우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됐고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됐다.  
 
1975년 천원권 지폐가 발행될 때 전면에 이황 명륜당 매화를 그렸고 후면에 정선의 계상정거도를 그렸다. 계상정거도는 이황이 창건한 도산서원의 초창기 모습이다. 이황은 매화를 유난히 좋아하여 매화시첩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