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 작가/박사 인터뷰 특별 초대석 김희정 작가 인터뷰 구일암 발행인 김희정 작가는 상담학 박사로서 “못다 핀 꽃망울들에게”라는 저서를 출판하여 인터뷰를 하게되었다. ◆김희정 상담학박사 프로필 아래와 같다. - 아름다운동행 상담센터 소장 - 서울관악가족상담센터 센터장 - 국제공인이마고부부치료사 (CIT) - 국제공인이마고워크샵프리젠터 (CWP) - 한국상담학회 전문영역 슈퍼바이저 - 한국부부가족상담협회 가족상담 수련감독 - 한국부부가족상담협회 부부상담 수련감독- 한국부부상담연구소 부부치료 이론 및 실제 강사 - 서울가정법원 후견감독심리상담위원 - 의정부 지방법원 소송이혼 상담위원 - 한국에니어그램학회 이사 - 한국상담심리학회 정회원 - 내면아이, 이마고 부부관계치료에 능통한 상담전문가. - K-뉴스그룹 중소벤처뉴스/TV 칼럼리스트 ◆이번 10월에 출간한 저서 [못다 핀 꽃망울들에게] <김희정 작가> 의 생각 길을 걷다 임산부를 만나게 되면 잠시 가던 길 멈추고 충분히 좋은 양육자 되도록 기도한 후 발걸음을 재촉한다.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그 자녀의 인생이 180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나의 자녀에게 충분히 좋은 양육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1) 봉오동전투 홍범도 홍범도(洪範圖)는 홍경래의 친족으로 증조부 홍이팔은 처형됐고 가문은 멸족이 되었다. 할아버지 홍동철이 구사일생으로 평양으로 은신하여 살아났다. 어머니는 홍범도를 낳고 사망했고 아버지는 홍범도가 9살이 되던 해에 사망했다. 홍범도는 머슴살이를 하다가 평양 감영 소속 부대의 군인이 되었다. 22세에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를 하였으나 비구니 단양이씨와 열애 끝에 환속하고 북청에서 사냥꾼이 되었다.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에 참여했다. 1907년 일제가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고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자 저항했다. 홍범도의 부인 단양이씨는 일제에 체포되어 옥사했고 아들 홍양순은 일제와 싸우다 전사했다. 홍범도는 북청, 갑산, 혜산 일대에서 항일활동을 계속했다. 홍범도는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백두산 일대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1919년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사령관이 되어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본군을 습격했다. 대한독립군을 대한북로독군부로 개편했다. 1920년 6월 홍범도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북로독군부 소속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했다. 일본군 정규군 157명의 사망자와
조선의 시인 11. 김득신(金得臣) 공산도중 하제후작(公山途中 下第後作) / 김득신(金得臣) 올해에도 실의하니 나그네 마음은 쓸쓸하여 외로운 여관에서 밤새도록 잠 못 이루네 용악의 짙은 구름 푸른 산빛 덮어 버리고 금강의 거센 물결 차가운 소리로 울부짖네 온갖 마귀 장난인지 나의 운명 궁박하고 모든 일 어그러지니 내 인생 한스럽네 북쪽 향해 고향으로 눈길만 보내니 저물녘 비바람에 돌아갈 길 어둡구나 김득신(金得臣)은 충청도 공주에서 열린 향시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고향인 충청도 목천으로 가면서 속상한 마음을 시로 남겼다. 과거시험에 이건창은 15세에 급제했고 김득신은 59세에 급제했다. 김득신은 김시민(金時敏)의 손자이며 김치(金緻)의 아들이다 10세에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고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아 기억력이 좋지 않았고 총명하지 못했다 심지어 몇 시간 전에 공부한 것을 모두 잊어버리는 둔치였다 김시민은 진주목사로 재직 중에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사하여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봉해졌고 영의정에 추증됐다. 김치는 김시회의 아들이자 김시민의 양자이며 김득신의 생부이고 인조반정으로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학문의 성취가 늦는다고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다.
광주 송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 바로바로 떡갈비 “떡갈비”하면 광주에서 제일 유명한 맛집 “광주 송정 종가집 떡갈비”를 소개한다. 본 언론사 구일암 발행인은 본 언론사가 선정한 맛집 광주 송정 종가집 떡갈비 박영옥 대표를 만났다. 광주 송정 종가집 떡갈비는 광주 광산구 광산로19번길 26 동백빌딩 1층에 있다. <약도 보기> https://naver.me/F8niKQBM <광주 송정종가집 떡갈비 예약문의> HP-010-2616-0753 광주 송정 종가집 떡갈비 역사는 올해로 13년째 운영하고 있는 광주에 "떡갈비의 명소 맛집"이다. 2022년 광주광역시에서 “맛집”으로 선정된 떡갈비의 명소이다. 광주 송정역에 하차하여 광산구청 쪽으로 큰길을 따라 이동하면 광산구청을 미쳐 못가 오른쪽에 있다. 종가집 떡갈비는 전용 주차장도 있고 앞에 공영주차장도 주차할 수 있어서 편하게 주차를 할 수도 있다. 이곳은 명성이 있는 맛집으로 예약하지 않으면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맛집으로 선정된 이유가 따로 있다. 음식을 만들 때 가족과 소중한 분에게 대접한다는 마음으로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소중하게 정성을 다한다. 음식도 다양하다.
조선의 시인9. 신흠(申欽) 야언(野言) / 신흠(申欽)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늘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네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본질을 잃지 않고 버들은 백 번 꺾여도 새 가지를 피워내네 신흠은 정2품 우참찬 신용(申瑛)의 손자이고 종7품 개성도 사 신승서(申承緖)의 아들이다. 신흠의 아들인 신익성은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의 남편이다. 신흠은 어려서 양친을 잃고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외할아버지 송인수에게 경서와 제자백가를 공부했다. 신흠은 진사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여 정5품 지평(持平)으로 특진했다. 춘추 제씨전을 편찬한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로 승진했다. 신흠은 선조가 사망하며 영의정 유영경, 우의정 한은인, 평안도 관찰사 박동량, 경기도 관찰사 서성, 예조판서 허상, 대사헌 한준겸 등과 더불어 7명의 신하에게 유일한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의 보필을 부탁받아 유교칠신(遺敎七臣)의 한 사람이 되었다. 신흠은 광해군이 즉위하자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어 10년 동안 야인으로 생활했다. 다시 인목대비의 폐비사건으로 춘천에 유배되어 5년 만에 해배됐
안녕하십니까. 드림 솔루션 대표 조중희 입니다. 요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의 경제적인 불안은 고물가, 고유가, 고금리-3고로 인하여 건국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자사에서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기업토탈경영 솔루션을 진행하여 어려운 환경을 극복할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 행복을 함께만들어 드리는 회사입니다. 요즘 기업들이 재정상의 이유와 인력운영상의 이유로 많이 도산되고 있습니다. 정부기관에서는 많은 문제점들을 보완하기 위하여 정보들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중소기업대표님들께서는 해당정보를 어떻게 어디서 알고,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잘 모르십니다. 회사는 예산관리, 마케팅관리, 시스템운영, 이 세가지를 잘 관리 해야지만 성장하고 잘 운영이 된다고 합니다. 자사는 통합적인 경영에 대한 정보제공 및 지도와 참여를 통해, 기업대표님들을 도움드리고 있습니다. 단일화된 세무와 노무에 대해서만 컨설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님들의 시각에서 주기적으로 어떻게 업무를 진행되어야 할지, 재무와 운영의 시각으로 도움 드리고 있습니다. 자세한 업무범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기업통합컨설팅 2. 기업세무
조선의 시인7. 송익필 山行 (산행) / 宋翼弼 (송익필) 산행 중에는 앉는 것을 잊고 앉으면 가는 것도 잊고 말을 소나무 그늘 아래 쉬게 하고 물소리를 듣네 내 뒤에 오던 몇 사람이나 나를 앞서가는가 각자 그리 그칠 데로 돌아가는데 또 무엇을 다투리 송사련은 좌의정 안당이 반역을 꾀한다고 무고하여 안씨 일가를 멸문시키고 재산과 노비를 차지했다. 정3품 절충장군 등을 역임하며 30년 동안 권세를 누렸다. 신사무옥이 무고로 밝혀지자 관직이 삭탈됐고 서얼로 환천됐다. 송익필은 송사련의 서자로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송사련의 무고죄 때문에 독학으로 성리학을 수학했다. 25세에 초시에 합격했으나 ‘얼손(孼孫)이 과거시험을 봤다’ 라는 상소를 받아 합격 자격이 박탈됐고 서얼로 환천됐다. 송익필은 벼슬을 단념하고 고양 구봉산에서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단념하며 이이 성혼 정철 조헌 등과 교우했다. 해동 18현인 김장생, 문묘와 종묘에 종사 된 김집, 인조반정 공신인 김유, 정철의 아들인 정홍명 등을 양성했다. 송익필은 서인에 속했고 문장에 능해 이율곡, 최립, 하응림, 최경창, 이달, 백광훈,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가로 꼽혔다. 송익필은 정여
조선의 시인5. 황 현 (黃玹) 絶命詩(절명시) / 황현(黃玹)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황현은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며 전라도 광양 출신으로 구례에서 성장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우하며 흥선대원군과 민씨척족의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일본과 외세의 침입 등의 현실을 보면서 많은 서적을 읽었다. 황현은 보거과(保擧科)에 합격했으나 문벌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원에서 3등급이 하락되는 현실을 사대를 한탄하며 낙향하여 역사책을 저술을 하였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국을 통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1910년 국권 피탈이 선포되자 황현은 유서를 남기고
사)한국소비자연합 광주광역시지회 (이영숙 지회장)과 회원들과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 체험투어에 나섰다. 오늘 오전 9시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곡동에 위치한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송현 천익출 조합장)을 방문하여 우리 농산물을 살리고 우리 밀 체험 학습을 하였다. 소속 회원 55명과 함께 우리 농산물을 우리가 지키며, 우리 농산물에 우수성과 우리 농산물 소비촉진을 위해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우리 농산물을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가 홍보대사가 되자고 하면서 회원들과 함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영숙 회장은 오늘 여기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을 찾아서 와 보니 지금까지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후회된다고 하면서 오늘부터 한국 우리 밀 홍보대사가 되어 우리 밀 소비촉진에 앞장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송현 천익출 조합장)은 우리 농협을 찾아주셔서 우리 밀을 생산하고 있는 농가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하면서 우리 농산물 우리 밀이 소비가 1% 되지 않는 상황에 오늘 이영숙 회장께서 많은 회원들과 우리 밀 체험 학습을 오셔서 우리 조합과 우리 밀 농가에 큰 용기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하면서 우리 밀 소비촉진에
만남에는 여러가지의 만남이 있습니다. 생선같은 만남, 꽃송이 같은 만남, 건전지 같은 만남, 지우개 같은 만남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손수건 같은 만남" 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힘이 들 때는 송알송알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도 닦아주는 손수건 같은 만남! 아무리 더러운 것을 닦고 닦아도 빨면 깨끗하게 새 것처럼 우리를 위해 위해 덮어주는 손수건 입니다. 우리는 어떤 만남을 만들 것인지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몸이 가는 길이 있고 마음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걸을수록 지치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멈출 때 지칩니다. 또한 몸이 가는 길은 앞으로 앞으로만 뻗어 있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여러 갈래 길과 돌아가는 길도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젖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더욱 더 깨끗해집니다. 몸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시원해지며 따뜻함과 사랑을 느낍니다. 혼자서 가는 길은 지치고 힘들겠지만 함께 가는 길엔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나며 마주보는 눈빛에 작은 입가에 미소도 배시시 번져갑니다. 어느 덧 11월이 우리에게 왔음을 알려줍니다. 푸른 가을 하늘을 마음
조선의 시인3 월산대군 有所思(그리움) / 월산대군(月山大君) 朝亦有所思 暮亦有所思 (조역유소사 모역유소사) 所思在何處 千里路無涯 (소사재하처 천리로무애) 風潮望難越 雲雁托無期 (풍조망난월 운안탁무기) 欲寄音情久 中心難如絲 (욕기음정구 중심난여사) 아침에도 그리운 사람 저녁에도 또 그리운 님 사랑하는 님 어디 계시나 천릿길 아득히 먼 곳 풍랑으로 건널 수 없고 구름 속 기러기라 소식 못 전해 오랜 사랑 전하고 싶지만 내 마음은 엉크러진 실타래라네 월산대군은 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손자이며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아들이다. 8대 예종의 조카이고 9대 성종의 동복형이다. 월산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와 문장이 뛰어났고 성품이 강직하고 술과 풍류를 즐겼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으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의경세자로 책봉됐다. 세조가 사망하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즉위하여 14개월 만에 사망했다.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과 의경세자의 적장자 월산대군을 대신하여 성종이 즉위했다. 월산대군은 정희왕후 인수대비 한명회 등의 농간으로 성종에게 권좌를 빼앗겼다. 한명회는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종의 즉위에 공헌했다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어
조선의 시인1, 정 도 전 (鄭 道 傳) 題咸營松樹(제함영송수) / 정도전(鄭道傳) 蒼茫歲月一株松 (창망세월일주송) 生長靑山幾萬重 (쌩장청산기만증) 好在他年相見否 (호재타년상견부) 人間俯仰便陳蹤 (인간부양변진증)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청산에서 자람은 어찌 만 배나 중하지 않으랴만.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 정도전은 경상도 영주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하고 명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다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정도전은 고려의 혁명을 위해 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가서 천명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자고 요청한다. 정도전은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주장하며 우왕 창왕을 폐위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공양왕마저 폐위하고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옹립했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어 체제와 관제를 정비했다.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국교로 삼아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여 태평성대를 추구했다.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건축하여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정도전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