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 준비는 언제나 분주했다. 그렇기에 출근하는 길에 어디를 들려서 간다는 것은 더더욱 바쁘고 분주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늘 언제나. 내게는 우리 집과 가까이 살고 계시는 친정엄마가 계셨다. 시간 개념 없이 전화하시는 엄마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를 놓칠 때가 많았다. 어느 금요일 이른 아침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돌아가시기 삼 일 전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걸려온 전화를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받게 되었다. 엄마의 말씀은 오전에 봉천동 현대시장에서 장을 보고 오겠다는 말씀이셨다. 그날은 나의 일정상 늦게 출근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출근하는 길에 모시고 시장에 내려드리겠다고 전해 드렸다. 시장에 내려드린 날 오후 엄마에게 전화를 드렸다. 받지 않으셨다. 약간의 걱정스러움이 밀려왔다. 시장에 내려드릴 때 쉽게 그곳을 알아보지 못하시고 "여기가 어디냐? 오메"라며 엄청 숨차 하시고 장소를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셨기에 드린 전화였다. 내려드릴 당시 좌회전 차량들이 계속 오는 상황이라 엄마를 내려드리기 바빴고 교통 흐름 상 그 자리를 빨리 벗어나야만 했다. 엄마는 세 번째로 전화를 드렸을 때 비로소 받으셨다. 휴~ 다행이었다. 나도 무언가 직감을 한
이낙연는 동아일보 기자, 국회의원, 전라남도 지사, 국무총리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다양한 공적 직책을 맡은 자이다. 그런데 그런 화려한(?) 직책을 맡은 자이기에 전 동아일보 기자, 전 전라남도 지사, 전 국무총리, 전 더불어민주당대표 등의 칭호를 붙이고 싶었지만 이낙연의 그동안의 여러 조직들을 거치면서 그가 이뤄낸 업적 및 행적을 보면 그 어느 직함도 붙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는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을 할 때 신문 지상에 알려진 사건들을 파악해 보면 뚜렷한 실적을 내세우기가 쉽지 않았다. 본고에서는 주관적인 기술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두 번에 걸쳐 제시하니, 이낙연이 어떤 능력을 갖춘 정치인인가를 독자들 스스로 판단해 보기를 바란다. 첫째는 이낙연이 전 동아일보 기자일 때 전두환 찬양 기사로 시민들로부터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었다. 이의 발단은 ‘서울의 봄’ 계기로 회자되는 ‘전두환 찬양’ 기사이다. 이낙연은 1979년 신문사에 입사했고 전두환은 1980년 대통령이 됐다. 비슷한 시기 한 사람은 동아일보에, 또 한 사람은 청와대에 둥지를 튼 셈이다. ‘전두환 찬양’의 진위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 ‘이낙연 기자’의 과거 기사를 확인
미암 유희춘(眉巖 柳希春, 1513~1577)은 전라도 해남 출신으로 김안국과 최산두의 문인이다. 아버지 유계린(柳桂鱗)은 순천으로 유배온 김굉필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로, 벼슬을 하지 않고 해남에서 독서만 하였다. 외할아버지 금남 최부(崔溥, 1454~1504)는 나주 출신으로 조선의 3대 기행문인 ‘표해록’을 남겼고 갑자사화로 처형된 호남의 대표적 사림이었다. 부인 송덕봉(宋德奉)은 담양 출신의 여류시인으로 유배 중인 남편을 찾아 함경도 종성까지 가서 고락을 함께 하였다. 유희춘은 25살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을 시작했다. 세자 인종과 임금 명종을 가르쳤고 33세에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해남으로 귀향했다. 34세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고 고향인 해남에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로 이배됐다. 문정왕후가 죽자 충청도 은진으로 다시 이배됐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석방되었다.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함경도에서 20년 동안 유배생활 을사사화는 윤원형 등 소윤(小尹) 일파가 윤임 등 대윤(大尹) 일파를 축출하고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양재역 벽서사건은 권력을 잡은 윤원형이 ‘위로는 여주(女主), 아래에는 간신 이기(李芑)가 있어 권력
중소벤처기업부와 창업진흥원이 운영하는 「K-Startup Issue & Trend」는 코로나19 이후 급변하고 있는 국내외 핵심 이슈와 트렌드를 다루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모바일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제공하고, 국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중기부와 창진원의 페이스북 등 SNS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또한, 카카오톡, 텔레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활용해 주변 사람들에게 쉽고 빠르게 유용한 이슈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웹·모바일 발송 등을 통해 스타트업들에게 배포 서비스도 진행한다. 오늘은 따뜻한 겨울을 꿈꾸는 에너지 혁신 스타트업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따뜻한 겨울을 꿈꾸는 에너지 혁신 스타트업 최근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전국에 영하권의 강추위가 이어지고 있다.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동아시아와 북미 지역에서 겨울철 한파가 증가한 경향을 보인 원인은 대서양과 태평양 중위도 해양전선 지역의 열 축적 때문임을 규명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온난화 심화 전망과 달리 이상한파가 빈번히 발생해 왔으며, 다수 전문가들이 북극바다 얼음
중소벤처기업부와 창업진흥원(원장 김용문, 이하 창진원)이 운영하는 「K-Startup Issue & Trend」는 코로나19 이후 급변하고 있는 국내외 핵심 이슈와 트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스마트폰으로 언제 어디서나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모바일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제공하고, 국민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중기부와 창진원의 페이스북 등 SNS를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카카오톡, 텔레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활용해 주변 사람들에게 쉽고 빠르게 유용한 이슈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웹·모바일 발송 등을 통해 스타트업들에게 배포 서비스도 진행합니다. 오늘은 에듀테크, 교육의 새로운 바람을 알아보겠습니다. 에듀테크, 교육의 새로운 바람 지난 11월 16일,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졌다. 이번 수능시험은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교사들이 점검단을 꾸려 '킬러문항 초고난도 문항) 을 걸러 내고, 새로운 방식으로 변별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를 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수험생들이 느끼는 체감 난이도 또한 전반적으로 높았다는 평이다. 우리나라의 대학입시는 한동안 수시전형이 주를 이
시아파의 맹주 '이란'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관습에 따라 칼리파를 선출했다. 1대 칼리파 바르크는 무함마드의 장인이며 2년 만에 사망했다. 2대 칼리파 우마르는 무함마드의 장인이며 10년 만에 살해됐다. 3대 칼리파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이며 12년 만에 살해됐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 동생이자 무함마드의 사위이다. 알리는 3대 칼리파 우스만이 살해되자 4대 칼리파에 선출됐다 알리는 이슬람교도의 내분으로 암살됐고 알리는 지지하는 사람들을 시아파라고 한다. 시아파 국가는 이란,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예멘, 바레인 등이다. 시아파 이란은 면적은 세계 18위이고 인구는 8,300만 명이다. 수니파 사우디는 면적은 세계 13위이고 인구는 3,400만 명이다. 이란은 핵무기로, 사우디는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 이란 이슬람 공화국은 오리엔트의 주인공으로 1935년 이란으로 개칭했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이슬람 종교 지도자가 최고 권력을 가지는 신정(神政)체제로 변화했다. 호메이니를 이어 라흐바르가 통치하고 있다. 이란은 팔레비 왕조 시기에는 친미 국가였고 이란혁명 이후 반미 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미국의 핵 개발을 빌미로 진행된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570년 쿠라이시족 아버지 압둘라가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사망하여 유복자로 메카에서 태어났다. 6세 때 어머니와 8세 때 조부마저 사망하자 가난한 삼촌 탈리브의 보호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부자인 과부 카디자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무역에 종사했다 25세의 무하마드는 40세의 과부 카디자의 청혼을 받아 혼인했다. 무함마드는 경제적 부를 얻어 가난한 삼촌 탈리브의 아들인 알리를 입양했다. 무함마드가 40세 되던 610년 메카 북쪽 교외 자발안누르 산(山) 동굴에서 명상하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무함마드는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았고 우상숭배를 배격하고 알라가 유일신임을 주장했다. 무함마드는 메카 지배층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무함마드는 이슬람 공동체를 구성하여 1만 군대를 이끌고 메카를 무혈 정복했다 무함마드는 정복 전쟁을 계속하여 아라비아 반도 대부분을 통일했고 632년 이별의 순례를 마치고 사망했다. 아부 바크르는 무함마드의 부인 아이샤의 아버지이다 무함마드의 이별의 순례를 지휘하고 무함마드의 공중예배를 인도했다 정치적 행정적 기능을 이어받아 초대 칼리프가 되었고 아라비아 반도 모두를 손에 넣고 2년 만에 사망했다
고죽 ‘최경창’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박순의 문인(門人)으로 문장과 학문에 능통했고 시와 글씨에 뛰어났다.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청백리 ‘최만리’의 5대손이고,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최수인’의 아들이다. 최경창이 어려서 영암에서 왜구에게 포위되자 퉁소를 구슬프게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함경도 북평사에 있을 때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고 관비(官婢)를 사랑하여 탄핵됐다. 황희, 맹사성, 박수량을 ‘조선의 3대 청백리’ 라고 하며 조선에는 200여 명의 청백리가 있었다. 최경창은 죽어서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청백리로 녹선됐다. 왕명에 따라 청렴하고 결백함이 뛰어난 관리를 청백리로 선정하여 표창했다. 살아있을 때엔 염근리라고 불렀다가 사후에는 청백리로 불렸다. 최경창은 학문과 문장에 능하여 이이, 송익필 등과 시를 주고받았고, 정철, 서익 등과 교류했다. 송익필, 이산해 등과 함께 8문장으로 일컬어졌다. 최경창은 백광훈, 이달과 함께 조선의 삼당시인으로 불렀다. 당시 사대부들은 오랫동안 권위와 규범의 논리에 치우치며 현실을 외면하는 시풍을 따랐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최지몽(崔知夢, 907년~987년)은 전남 영암 구림 출신으로 63년간 여섯 임금을 섬긴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본명은 최총진(崔聰進)이며 해상무역을 통해 유력한 토착세력으로 성장한 최상흔(崔相昕)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상흔은 태조 왕건의 나주 정벌에 협력했고 아들 최지몽은 고려가 건국하자 벼슬을 얻었다. 최지몽은 불교경전 무량수경을 주석한 현일(玄一) 스님에게 경서와 사서를 익혔고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했고 경사(經史)에 통달했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삼한을 통일하고 다스릴 길몽이라고 꿈을 해몽하여 ‘지몽(知夢)’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3년간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등 여섯 임금을 섬겨> 최지몽은 태조 왕건을 도와 새로운 왕조 ‘고려’를 개창하는 데 크게 기여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최지몽은 또 하늘의 별을 보고 “곧 변란이 있을 것이니 거처를 옮겨야 한다”고 조언해 왕족 왕규(王規)가 일으킨 2대 임금 ‘혜종’ 시해 음모를 막아냈다. 혜종은 나주 출신 정화왕후 오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건의 장남이다. 3대 임금 ‘정종’이 즉위하여 왕규(王規)를 처형하고 최지몽의 공로를 포상했다. 그러나,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1년~412년)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396년 백제를 공격하여 50여 개 성을 빼앗고, 왕족과 대신들을 잡아갔다. 백제 17대 아신왕(재위, 392년~405년)은 왜국의 힘을 빌려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태자 ‘전지(腆支)’를 왜국에 볼모로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신라 19대 내물왕(재위, 356년~402년)은 왜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왕자 ‘미사흔’을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 왜국은 백제와 신라에 양다리 외교를 하였다. 402년 백제는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오자 크게 환대했다. 403년 백제는 왜국에 아직기(阿直岐, 생몰년 미상)를 말과 함께 사신으로 파견했다. 아직기는 경서에 능하여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백제의 훌륭한 학자인 왕인을 왜왕에게 추천했다. 태자 전지(腆支)는 아버지 아신왕이 사망하자 왜왕에게 백제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18대 전지왕(재위, 405년~420년)으로 즉위했다. 일본에서 학문의 시조이자 아스카 문화의 원조로 추앙받아 왕인(王仁, 생몰년 미상)은 백제시대 영암 출신의 학자다. 405년 왜왕의 초빙으로 도공, 야공, 와공 등을 데리고 유교경전인 논어(論語) 10권, 기초한자인 천자문(千字文) 1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구름 위를 나는 새도 돌아오는 집’. 운조루(雲鳥樓)는 운조루(雲鳥樓)는 류이주(柳爾胄, 1726년∼1797년)가 1776년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명당에 건축한 목조 기와집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이다. 류이주는 조선 후기 무신이자 건축가로 경상도 대구에서 태어나서 17세에 한양으로 올라가서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다. 홍봉한의 천거로 관직에 등용되어 전라도 낙안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당쟁에 휘말려 함경도 삼수로 유배됐다. 류이주는 정조가 즉위하자 정3품 오위장에 복직하여 함흥성과 수원성을 쌓았고 평안도 용천부사와 함경도 삼수부사를 역임했고 정2품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류이주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낙안군수 당시 보아두었던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로 내려와서 은거했다. <류이주, 금환락지(金環落地)의 명당에 ‘운조루’ 지어> 운조루는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금환락지는 선녀가 땅에 내려와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국을 뜻한다. ‘운조루’는 송나라의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차운했다. <雲無心以出岫(운무심이출수) 구
버림받은 독립운동가. 박상희 박상희(朴相熙)는 1905년 경북 칠곡군 약목면에서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가족들은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로 이사했다. 구미보통학교 졸업했고 대구사범고등학교에 낙방했다. 박성빈은 몰락 양반가 출신으로 정9품 효력부위(効力副尉)를 지냈고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처형 직전에 사면됐다. 백남의는 남편의 경제적 무능력으로 가족의 생계를 이끌었다. 박성빈과 백남의는 박상희와 박정희의 부모이다. 박상희는 선산청년동맹의 준비위원 상무위원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결집해 결성한 신간회(新幹會) 간부로 항일활동에 앞장섰다, 항일민족지 조선중앙일보의 대구지국장과 동아일보의 구미지국장 등으로 활동했다. 박상희는 황태성과 함께 여운형이 조직한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건국동맹 (朝鮮建國同盟)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미지부를 창설했고 인민위원회 구미지부의 내정부장을 역임했다. 박상희는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선산대표로 참가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