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김부식이 편찬한 국보 322-1호, 제322-2호 및 보물 제722호 삼국사기는 일연이 편찬한 제306-1호, 제306-2호, 제306-3호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참고(參考) 8명(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과 관구(管句) 2명(김충효, 정습명)이다. 김부식이 편찬의 주역으로 10명의 편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간(臺諫) 출신들이 많고, 김부식도 대간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삼국사기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사회가 동요하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고려 인종의 명으로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년) 완성했으며, 1174년에 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었으며,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흥망성쇠의 정사를 기술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사대주의 관점에서 중국을 중심에 두고 서술했다. 신라 위주로 기술하여 백제의 기록은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누락했다. 고조선, 동예, 옥저, 부여, 삼한, 가야, 발해 등의
(유학 특집) 4성 증자와 자사 4성 증자(曾子) 안연(顔淵)는 32세에 요절했고 염백우(冉伯牛)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 민자건(閔子騫)은 제자를 두지 않았다 재아(宰我)는 제(齊) 나라에서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됐다. 계로(季路)는 위(衛) 나라에 왕위 계승에 휘말려 살해됐다. 자장(子張)은 고향인 진(陳) 나라로 돌아가 활동했다. 자공(子貢) 자하(子夏) 자유(子游)는 3년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염유(冉有)는 위(衛) 나라에 남아 권력을 향유했다 결국 증자(曾子)가 공자의 적통이 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따라 진(陳), 채(蔡)에 갔던 사람은 이제 내 곁에는 한 사람도 없다. (子曰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 공자와 더불어 진(陳) 나라와 채(蔡) 나라에 동행했던 제들을 선정하여 증자(曾子)는 공문십철(孔門十哲)에 포함되지 않았다. 증자(曾子)는 전국시대 노(魯) 나라 산둥성 출신의 사상가로 이름은 증삼(曾參)이고 자는 자여(子輿)이며 존칭으로 증자라고 부른다. 증자는 공자보다 46세 연하의 제자로 제자 중 가장 존경을 받았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했다. 증자는 세계의 모든 것이 결국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 가능하다며 정신을 실
나철(羅喆, 1863년~1916년)은 전남 보성 벌교 출신으로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의 초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나두영(羅斗永), 개명은 나인영(羅寅永), 아호는 홍암(弘巖)이다. 29세가 되어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호남에서 비밀단체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나철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직전 오기호, 이기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 중국, 일본 3국의 회맹(會盟)을 제안했다. 나철은 1907년 오적암살단을 결성하고 을사오적을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10년 유형을 선고받고 전남 신안군 지도로 유배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나철은 조선독립을 위한 구국운동이 좌절되자 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변경했다. 나철, 대종교 창시하고 일제의 폭정을 통탄하는 유서를 남기고 순교 나철은 도쿄에서 ‘두일백’으로부터 대종교 창시의 계기가 된 ‘단군교 포명서’를 받았고 서울에서 ‘백전’으로부터 대종교 경전이 된 ‘삼일신고’와 ‘신사기’를 받았다.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檀君敎)를 공표하고 제천의식을 거
(유학특집) 4성 맹자와 공문10철 4성 맹자 맹자(孟子)는 전국시대 추(邾) 나라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여 노나라로 건너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이 되어 6경(六境)을 수학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계승했다. 맹자의 고향인 추(鄒) 나라는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으로부터 산동성(山東省) 추성시(鄒城市) 지역을 봉분 받은 제후국으로 주루국(邾婁國)이라 하였다. 전국시대 때 추(鄒) 땅으로 이주하고 국명을 추(鄒) 나라로 변경했고 초(楚) 나라에 병합됐다. 맹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을 위해 묘지에서 시장으로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가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전환다. 맹자는 40대에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람하며 제(齊) 나라 제선왕(齊宣王)을 만났다. 제선왕은 맹자 추연 순우곤 등 제자백가를 등용했고 소진(蘇秦)의 주장에 따라 제나라는 조 위 한 연 제 초와 합종하여 진(秦) 나라를 공격했다. "신하로서 군주를 죽이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잊혀진 애국지사) 삼의사 백정기 백정기(白貞基)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서 성장했고 19세에 서울로 상경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 전단을 가지고 고향 부안으로 내려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서울 인천 등에서 일본인 및 군사 시설에 대한 공격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일본에 밀항하여 후지산 서쪽의 야마나시현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여 메이지 텐노를 암살하려다가 간토 대지진으로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1924년 베이징에서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창립했다. 백정기는 난징으로 거점을 옮겨 조선 중국 필리핀 일본 타이완 베트남 등 대표가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창립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행동대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일본 요인을 암살하고 저격하여 '검은 옷을 입은 공포의 대상'으로 불렀다. 1933년 백정기 정현섭 원심창 등은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주중(駐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암살을 모의
중소벤처뉴스 정길훈 기자 | 김희정 박사 부부클리닉 제3탄 “대화 소통의 기술” <기 고 문> 아름다운 동행 상담센터 김희정 소장 [아름다운 동행 상담센터 김희정 박사 / 소장] 아내는 남편을 만나 알게 된지는 한 5, 6년 되었다. 먼 거리를 마다하고 연애 감정을 키워오다 결혼한지는 1년이 되었다. 남편과 동거 포함 횟수로는 약 3년 정도 되었고, 실제 부부처럼 결혼 생활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5년이다. 차이가 나는 이유는 현재까지도 직장 문제로 각자 떨어져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지방에서 친정어머니를 도와 자영업을 하고 있다. 2주에 한 번씩 남편 홀로 살고 있는 신혼집인 서울로 와서 2주 정도 머물다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는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신혼집에서 남편과 생활할 때 아내가 느끼는 감정이 문제였다. 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하였다. 「남편과 아내는 바다로 향하였다. 항해사의 역할을 남편에게 맡기고 바다에 배를 띄워 가는데 항해사로서의 기본을 남편이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항해사이기에 바다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태풍불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어느 방향으로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과 부통령 이시영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 박은식(朴殷植)은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박용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교유하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향시에 합격하여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를 모신 사당인 숭인전 능참봉으로 재직했다. 박은식은 불혹의 나이가 되자 주자학에 의구심을 갖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했다. 박은식은 장지연 신채호 남궁억 등과 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장지연과 공동 주필이 되어 애국적인 사설을 썼다. 황성신문은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항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정간당했고 이듬해 복간되었고 한일합방 조약으로 폐간되었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은식은 영국인 어니스트가 창간하여 조선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환됐다. 해
중소벤처뉴스 류권승 기자 UN에 일본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 투기 반대에 대한 민국 염원을 담아 보내자 -UN에 일본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 투기 반대 진정서 접수하기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면 누구나 ......... 일본 정부는 24일 기점으로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를 시작하였다. 바다는 지구의 한 국가의 소유물이 아닌 전 세계인들의 자산이며, 공동의 재산이다. 그러나 이런 소중한 바다를 자신의 자산인 것처럼 바다에 핵 오염수를 무단 투기하는 국가가 있다.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이다..... 그들은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방류하기 위하여 IAEA에 많은 기부금을 내고 IAEA는 이 것에 화답하기 위해 후쿠시마 핵 오염수가 안전하다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윤석열 정부와 여당은 이 자료를 가지고 핵 오염수 방류는 정당하다고 하여 핵 오염수 방류를 묵인하고 있다. 그러나 핵 오염수 방류로 인하여 앞으로 어떤 상황이 발생 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한 일드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하다. 길게는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결과가 후쿠시마 핵 오염수로 인한 결과인지 아닌지 애매한 결과를 만들어서 일본은 핵
중소벤처뉴스 신병철 기자 | <기고문>전진숙 빛고을비전창작소 이사장 "윤석열 정부 매국행위”라 강하게 비판하였다. 전진숙 빛고을비전창작소 이사장은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 사태에 대해 윤석열 정부를 "매국행위”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빛고을비전창작소 전진숙 이사장] 이번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 행위로 인하여 대한민국 800만자영업자 다 죽는다. 정부는 지원대책 당장 마련해야한다라고 매우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일본의 후쿠시마 핵 오염수 방류로 수산업계와 자영업자들의 피해가 현실화하였다며, 전진숙 빛고을비전창작소 이사장은 “이번 핵 오염수 방류 사태는 윤석열 정부가 국민을 버리고 일본과 손잡은 매국적인 행위”라고 규탄한다고 하면서 정부가 누구를 위하는 정부인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우리 국민을 위한 정부라면 이번 사태를 동조하는 것자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코로나19로 인하여 건국이래 최악의 상황을 3년이라 세월을 버티고,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할 정부가 자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도 않음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전진숙 이사장은 “일본 기시다 정부가 한,미,일 정상회담 이후 한국
한국 다도를 정립한 다성(茶聖), 초의선사 장의순 장의순은 1786년 전남 무안군 삼향면 왕산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해 19세에 해남 대흥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대흥사 뒷산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40년 동안 차와 더불어 살다가 1866년 81세로 입적했다. 장의순은 대흥사 완호(玩虎) 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법호 초의(草衣)와 법명 의순(意恂)을 받았다. 서산대사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고 하며 조선 중기에 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다. 초의선사는 ‘깨달으면 교(敎)가 선(禪)이 되고 미흡(未洽)하면 선(禪)이 교(敎)가 된다.’고 하며 조선 후기에 불교의 선풍을 일으켰다. 다도(茶道)는 중국의 육우(陸羽)가 8세기 중엽에 지은 ‘다경’에서 비롯되었다. 불교와 함께 다도가 신라와 일본에 전해졌다. 고려시대에는 사찰과 귀족 중심으로 번성했다가 조선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쇠퇴하여 명맥만 유지되었다. 19세기 초에 초의선사가 다도의 이론과 실제를 ‘동다송(東茶頌)’으로 정리함으로써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 다도를 중흥시켰다. 이는 초의선사를 다성(茶聖)으로 추앙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의선사는 ‘만들
(잊혀진 애국지사) 순국열사 홍범식과 의열단 김시현 순국열사 홍범식 홍범식(洪範植)은 정2품 이조판서를 역임한 홍우길의 손자이며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홍승목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를 시작으로 내부주사와 혜민서참서를 역임했다. 태인군수로 재직 중에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 보호책을 펼쳤다. 1907년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불평등 조약인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했다. 한일신협약은 정미 7늑약(丁未 七勒約), 3차 한일협약(三次 韓日協約) 이라 부른다.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했다. 일제는 특사 파견을 빌미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대한제국 군인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인영과 허위를 중심으로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했다.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 소탕 작전을 자행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세월을 함께한 친구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에게 질병만큼 무서운 것이 바로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나이를 먹어갈수록 옛 친구들의 근황이 궁금하고 만나고 싶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바쁜 인생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그때 그 친구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합니다. 정작 만나면 별 할 말도 없을 텐데도 서로 어떻게 나이를 먹고 살아왔는지 보고 싶은 것입니다. 우연히 어린 시절 함께 했던 친구들을 만난 노인은, 그 친구들과의 기억이라고 해봐야 몇 개 없을 터인데 몇 번이고 반복하며 엊그제 일처럼 수다를 떨며 정겨워합니다. 점심시간 되기 전에 도시락을 까먹다가 선생님께 혼난 일부터 여름철 발가벗고 함께 냇가에서 놀았던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나눌 때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기까지 합니다. 노년에 필요한 다섯 가지가 가족, 친구, 취미, 돈 그리고 건강이라고 합니다. 다 가질 수 없겠지만, 전화해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가끔 만나 옛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요. 親 친할 친, 舊 옛 구. 옛날부터 오랫동안 친하게 지낸 사람이 바로 친구입니다. 그래서 나이 들면서 동료나 동지는 만들 수 있어도 친구가 생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