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조(趙光祖)는 평안도 회천에서 종6품 찰방으로 재임하던 아버지 조원강(趙元綱)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온 김굉필(金宏弼)을 만났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에게 수학하여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조광조는 삼사의 언관으로 활동하며 소격서(昭格署) 폐지하고 현량과(賢良科) 실시하여 신진 사림파를 정계에 진출했다. 중종반정 공신들에 의해 폐출당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와 가짜 공신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여 훈구파와 대립했다. 조광조는 왕도정치 실현을 주창하다가 훈구파가 조작한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야기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되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사사됐다. 명종 때 영의정에 추증됐고 광해군 때 종묘와 문묘에 동시에 종사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 : 주(走)+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꿈꾼다는 뜻 ○절명시(絶命詩), 숨지기 전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최후 변론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이 하였네) 天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昭昭照丹衷 (일편단심 내 충심을 더욱 밝게 비추네) 이언적(李彦迪
김굉필(金宏弼)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김종직의 제자이자 정여창의 동문이다. 유교의 수신서(修身書)인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처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김굉필은 제자 김굉필이 스승 김종직의 현실타협을 비판하여 결별했다. 김종직이 사망하자 김굉필이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수기(修己) 치인(治人)을 실천하며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계승했다. 김굉필은 연산군 때 조의제문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어 전라도 순천에 이배됐다 폐비윤씨 사건을 빌미로 일어난 갑자사화로 처형됐다 광해군 때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문묘에 종사됐다 정여창(鄭汝昌)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정육을은 의주판관으로 재직 중 이시애 난으로 피살됐다.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됐으나 고사하고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다. 정여창은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됐다. 54세의 나이에 유배지 종성에서 사망하여 경상도 함양군 승안산 기슭에 묻혔다. 갑자
안향(安珦, 1243년 ~ 1306년 9월 12일)은 고려 후기 문신·학자·교육자다. 원래 이름은 안유(安裕)이다. 노년기에 안향(安珦)으로 개명했고 조선 문종의 피휘(避諱)로 안유(安裕)로 불린다. 교서랑, 동경유수, 집현전대학사 등을 역임했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를 호종하여 원나라를 방문했다. 안유는 원나라에서 주자의 저서인 주자대전(朱子大全)을 직접 필사하여 고려에 주자학을 최초로 소개했다.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고 이제현, 백이정, 이조년 등 후학을 양성했다. 안유는 고려 충숙왕 때 문묘에 배향했고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봉이 안유가 수학하던 숙수사(宿水寺) 터에 우리나라 최초로 백운동서원을 건립했다. 풍기군수 이황의 건의로 명종이 우리나라 최초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내렸다. 정몽주(鄭夢周)는 경상도 영천 출신의 고려 말의 유학자이다.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예문관제학, 수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신진사대부이다. 친원파를 배격하고 친명파가 되어 역성혁명을 반대하고 온건개혁을 주장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는 찬성하고 조선 개국에는 반대했다. 이성계 일파
해동18현 설총과 최치원 설총(薛聰)은 신라 중대의 유학자로 성골 진골 다음의 6두품 출신이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고 태종무열왕의 외손자이다. 불교에서 출가하여 환속하고 유교(儒敎)로 개종했다. 설총은 신문왕 때 국학에 입학했고 경덕왕 때 박사가 되었고, 중국 한자를 신라어로 표기하는 이두(吏讀)를 창시했고 꽃을 의인화하여 사치를 부리는 신문왕의 행실을 비판하는 한문소설 화왕계(花王戒)를 남겼다. 설총은 강수, 최치원과 더불어 신라 3대 명문장가로 꼽혔고 고려 현종 때 홍유후(弘儒侯)로 추증되고 문묘에 배향됐다. 원효 설총 일연 3인의 성현을 배출한 경북 경산에서 삼성현으로 추숭하고 있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하대의 유학자로 6두품 출신이다. 12세에 당나라에 유학가서 6년 만에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였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당희종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최치원은 귀국하여 49대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됐고 51대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상소하여 아찬(阿飡)에 임명됐다. 최치원은 한림학사 태산태수 천령태수 부성태수 등을 역임했고 최승우, 최언위와 함께 신라삼최 중
(고려가요) 서경별곡과 쌍화점 고려가요3. 서경별곡 서경별곡 / 작가 미상 서경이 서울이지마는 새로 닦은 서경을 사랑하지마는 여의기 보다는 여의기보다는 길쌈베 버리고서리도 사랑해 준다면 사랑해 준다면 울면서 쫓겠나이다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 서경별곡은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는 여인의 슬픈 심정을 읆은 고려가요이다. 지금의 평양인 서경에서 불린 노래이다. 악장가사(樂章歌詞)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에 수록되어 전한다. 조선 성조실록에 '서경별곡 같은 작품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종묘악(宗廟樂)으로 불가(不可)하다'고 기록됐다. 후렴구 '위 두어렁셩 두어렁셩 다링디리'는 북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로 음악의 효과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첫째 단락은 님이 떠나신다면 베도 버리고 따라가겠다고 한다. 둘째 단락은 구술의 끈처럼 천년을 홀로 지낸다 해도 믿음은 버리지 않겠다고 한다. 세째 단락은 님을 싣고 떠나가는 뱃사공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평양은 고조선의 마지막 수도였던 왕검성으로 비정하며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성이 위치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황폐해진 평양을 부흥시키기 위해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했다. 고려 3대 정종이 서경으로 천도하려다
(고려가요) 청산별곡과 가시리 고려가요1. 청산별곡 청산별곡(靑山別曲) / 작가 미상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얄라 가다 보니 불록한 술독에 독한 술을 빚는구나 조롱꽃 누룩이 나를 잡사오니 내 어찌 하리잇고 얄리얄리 얄랑성 얄라리얄라 청산별곡은 고려시대 무신정변 시기부터 대몽항쟁 시기까지 사이에 쓰여진 작자 미상의 고려가요이다. 조선 성종 때 편찬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와 조선 중종 때 편찬된 악장가사(樂章歌詞) 기록됐다. 1977년에 열린 제1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이스라엘 민요 '밤에 피는 장미'에 고려가요 '가시리'의 가사와 '청산별곡'의 후렴구를 붙여 이명우가 '가시리'로 노래했다. SG워너비가 이명우의 '가시리'를 리메이크하여 불렀다. SBS 창사 25주년 특별기획극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하는 '옥룡이 나르샤'에서 떠돌이 검객이자 정도전의 호위무사인 이방지가 '가시리'와 '청산별곡'을 섞어 구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다래는 예로부터 즐겨 먹던 산과일 중의 하나이며 양다래는 중국이 원산이며 뉴질랜드 국조인 키위와 비슷하여 키위라고 부른다. 머루는 옛날 구황식물의 하나로 포도과 산포도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 세종대왕 김구 유관순 안중근 등으로 나타난다 때에 따라서 박*리, 김*아, 박*성, 손*민, 조*필, 이*희, 유*석, B*S, 반*문 등 운동선수나 연예인 또는 정치인까지 존경하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종2품 3도 수군절도사로 나라를 구한 난세의 명장이자 성웅(聖雄)이며 사후에 정1품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4대 임금으로 조선의 기틀을 다지고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임금이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으로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를 지휘했다. 한국광복군을 창설했고 남북협상을 주도하다가 이승만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총격에 사망했다. 효창공원에 안중근 의사,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3의사와 함께 묻혀 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고등부에 재학 중에 천안으로 내려와 부모님과 함께 3.1운동에 참여했다.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는 현장에서 순국했고 유관순은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신없는 묘지에 비석만 세워졌다. 안중근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항일의병에 투신했다. 하얼빈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김부식이 편찬한 국보 322-1호, 제322-2호 및 보물 제722호 삼국사기는 일연이 편찬한 제306-1호, 제306-2호, 제306-3호 삼국유사와 더불어 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감수국사 김부식을 필두로 참고(參考) 8명(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과 관구(管句) 2명(김충효, 정습명)이다. 김부식이 편찬의 주역으로 10명의 편수관들 가운데 상당수는 대간(臺諫) 출신들이 많고, 김부식도 대간 계통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삼국사기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사회가 동요하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고려 인종의 명으로 김부식이 1145년(인종 23년) 완성했으며, 1174년에 송나라에 진상되기도 했다. 삼국사기는 기전체로 〈본기(本紀)〉, 〈연표(年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었으며,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흥망성쇠의 정사를 기술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사대주의 관점에서 중국을 중심에 두고 서술했다. 신라 위주로 기술하여 백제의 기록은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누락했다. 고조선, 동예, 옥저, 부여, 삼한, 가야, 발해 등의
(유학 특집) 4성 증자와 자사 4성 증자(曾子) 안연(顔淵)는 32세에 요절했고 염백우(冉伯牛)는 병에 걸려 사망했다. 민자건(閔子騫)은 제자를 두지 않았다 재아(宰我)는 제(齊) 나라에서 반란에 연루되어 살해됐다. 계로(季路)는 위(衛) 나라에 왕위 계승에 휘말려 살해됐다. 자장(子張)은 고향인 진(陳) 나라로 돌아가 활동했다. 자공(子貢) 자하(子夏) 자유(子游)는 3년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염유(冉有)는 위(衛) 나라에 남아 권력을 향유했다 결국 증자(曾子)가 공자의 적통이 되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따라 진(陳), 채(蔡)에 갔던 사람은 이제 내 곁에는 한 사람도 없다. (子曰從我於陳蔡者皆不及門也)" 공자와 더불어 진(陳) 나라와 채(蔡) 나라에 동행했던 제들을 선정하여 증자(曾子)는 공문십철(孔門十哲)에 포함되지 않았다. 증자(曾子)는 전국시대 노(魯) 나라 산둥성 출신의 사상가로 이름은 증삼(曾參)이고 자는 자여(子輿)이며 존칭으로 증자라고 부른다. 증자는 공자보다 46세 연하의 제자로 제자 중 가장 존경을 받았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했다. 증자는 세계의 모든 것이 결국 정신적인 것으로 환원 가능하다며 정신을 실
(유학특집) 4성 맹자와 공문10철 4성 맹자 맹자(孟子)는 전국시대 추(邾) 나라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상하여 노나라로 건너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이 되어 6경(六境)을 수학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여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계승했다. 맹자의 고향인 추(鄒) 나라는 주(周)나라를 건국한 무왕으로부터 산동성(山東省) 추성시(鄒城市) 지역을 봉분 받은 제후국으로 주루국(邾婁國)이라 하였다. 전국시대 때 추(鄒) 땅으로 이주하고 국명을 추(鄒) 나라로 변경했고 초(楚) 나라에 병합됐다. 맹자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의 교육을 위해 묘지에서 시장으로 다시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고사가 전한 때 학자 유향(劉向)이 지은 열녀전(列女傳)에 전환다. 맹자는 40대에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람하며 제(齊) 나라 제선왕(齊宣王)을 만났다. 제선왕은 맹자 추연 순우곤 등 제자백가를 등용했고 소진(蘇秦)의 주장에 따라 제나라는 조 위 한 연 제 초와 합종하여 진(秦) 나라를 공격했다. "신하로서 군주를 죽이고 아들로서 아버지를 죽이는
(잊혀진 애국지사) 삼의사 백정기 백정기(白貞基)는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서 성장했고 19세에 서울로 상경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 전단을 가지고 고향 부안으로 내려가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서울 인천 등에서 일본인 및 군사 시설에 대한 공격 활동을 전개했다. 1924년 일본에 밀항하여 후지산 서쪽의 야마나시현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다시 일본으로 밀항하여 메이지 텐노를 암살하려다가 간토 대지진으로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1924년 베이징에서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창립했다. 백정기는 난징으로 거점을 옮겨 조선 중국 필리핀 일본 타이완 베트남 등 대표가 모여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聯盟)을 창립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행동대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일본 요인을 암살하고 저격하여 '검은 옷을 입은 공포의 대상'으로 불렀다. 1933년 백정기 정현섭 원심창 등은 상하이 훙커우(虹口)에서 주중(駐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암살을 모의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과 부통령 이시영 ●잊혀진 애국지사 대통령 박은식 박은식(朴殷植)은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박용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교유하며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향시에 합격하여 기자조선의 시조인 기자를 모신 사당인 숭인전 능참봉으로 재직했다. 박은식은 불혹의 나이가 되자 주자학에 의구심을 갖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립협회에 가입했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하지만 독립신문은 이토 히로부미를 찬양했다. 박은식은 장지연 신채호 남궁억 등과 황성신문을 인수하여 장지연과 공동 주필이 되어 애국적인 사설을 썼다. 황성신문은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항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정간당했고 이듬해 복간되었고 한일합방 조약으로 폐간되었다.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고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박은식은 영국인 어니스트가 창간하여 조선 통감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이 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다. 대한매일신보는 한일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전환됐다.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