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시인5. 황 현 (黃玹) 絶命詩(절명시) / 황현(黃玹)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황현은 명재상 황희의 후손이며 전라도 광양 출신으로 구례에서 성장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우하며 흥선대원군과 민씨척족의 대립,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 일본과 외세의 침입 등의 현실을 보면서 많은 서적을 읽었다. 황현은 보거과(保擧科)에 합격했으나 문벌가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장원에서 3등급이 하락되는 현실을 사대를 한탄하며 낙향하여 역사책을 저술을 하였다. 하지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국을 통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허나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망국의 날을 맞아 죽는 선비 한 명이 없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 아니겠는가?> 1910년 국권 피탈이 선포되자 황현은 유서를 남기고
사)한국소비자연합 광주광역시지회 (이영숙 지회장)과 회원들과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 체험투어에 나섰다. 오늘 오전 9시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곡동에 위치한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송현 천익출 조합장)을 방문하여 우리 농산물을 살리고 우리 밀 체험 학습을 하였다. 소속 회원 55명과 함께 우리 농산물을 우리가 지키며, 우리 농산물에 우수성과 우리 농산물 소비촉진을 위해 우리가 몸소 체험하고 우리 농산물을 소비함으로써 우리가 스스로가 홍보대사가 되자고 하면서 회원들과 함께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영숙 회장은 오늘 여기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을 찾아서 와 보니 지금까지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는 게 후회된다고 하면서 오늘부터 한국 우리 밀 홍보대사가 되어 우리 밀 소비촉진에 앞장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우리밀농업협동조합(송현 천익출 조합장)은 우리 농협을 찾아주셔서 우리 밀을 생산하고 있는 농가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하면서 우리 농산물 우리 밀이 소비가 1% 되지 않는 상황에 오늘 이영숙 회장께서 많은 회원들과 우리 밀 체험 학습을 오셔서 우리 조합과 우리 밀 농가에 큰 용기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고 하면서 우리 밀 소비촉진에
만남에는 여러가지의 만남이 있습니다. 생선같은 만남, 꽃송이 같은 만남, 건전지 같은 만남, 지우개 같은 만남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손수건 같은 만남" 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힘이 들 때는 송알송알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슬플 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도 닦아주는 손수건 같은 만남! 아무리 더러운 것을 닦고 닦아도 빨면 깨끗하게 새 것처럼 우리를 위해 위해 덮어주는 손수건 입니다. 우리는 어떤 만남을 만들 것인지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몸이 가는 길이 있고 마음이 가는 길이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걸을수록 지치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멈출 때 지칩니다. 또한 몸이 가는 길은 앞으로 앞으로만 뻗어 있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여러 갈래 길과 돌아가는 길도 있습니다. 몸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젖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비가 오면 더욱 더 깨끗해집니다. 몸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마음이 가는 길은 바람이 불면 시원해지며 따뜻함과 사랑을 느낍니다. 혼자서 가는 길은 지치고 힘들겠지만 함께 가는 길엔 도란도란 이야기꽃이 피어나며 마주보는 눈빛에 작은 입가에 미소도 배시시 번져갑니다. 어느 덧 11월이 우리에게 왔음을 알려줍니다. 푸른 가을 하늘을 마음
조선의 시인3 월산대군 有所思(그리움) / 월산대군(月山大君) 朝亦有所思 暮亦有所思 (조역유소사 모역유소사) 所思在何處 千里路無涯 (소사재하처 천리로무애) 風潮望難越 雲雁托無期 (풍조망난월 운안탁무기) 欲寄音情久 中心難如絲 (욕기음정구 중심난여사) 아침에도 그리운 사람 저녁에도 또 그리운 님 사랑하는 님 어디 계시나 천릿길 아득히 먼 곳 풍랑으로 건널 수 없고 구름 속 기러기라 소식 못 전해 오랜 사랑 전하고 싶지만 내 마음은 엉크러진 실타래라네 월산대군은 7대 세조와 정희왕후의 손자이며 의경세자와 인수대비의 아들이다. 8대 예종의 조카이고 9대 성종의 동복형이다. 월산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와 문장이 뛰어났고 성품이 강직하고 술과 풍류를 즐겼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으로 태어났고 아버지가 의경세자로 책봉됐다. 세조가 사망하자 의경세자의 동생인 예종이 즉위하여 14개월 만에 사망했다. 예종의 적장자 제안대군과 의경세자의 적장자 월산대군을 대신하여 성종이 즉위했다. 월산대군은 정희왕후 인수대비 한명회 등의 농간으로 성종에게 권좌를 빼앗겼다. 한명회는 예종과 성종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종의 즉위에 공헌했다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어
조선의 시인1, 정 도 전 (鄭 道 傳) 題咸營松樹(제함영송수) / 정도전(鄭道傳) 蒼茫歲月一株松 (창망세월일주송) 生長靑山幾萬重 (쌩장청산기만증) 好在他年相見否 (호재타년상견부) 人間俯仰便陳蹤 (인간부양변진증) 아득한 세월 속에 한 그루 소나무여 청산에서 자람은 어찌 만 배나 중하지 않으랴만. 좋았던 시절에 서로 만나지 못하였으니 세상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묵은 흔적뿐이구나. 정도전은 경상도 영주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하고 명나라와 화친을 주장하다가 파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정도전은 고려의 혁명을 위해 함흥으로 이성계를 찾아가서 천명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자고 요청한다. 정도전은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을 주장하며 우왕 창왕을 폐위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공양왕마저 폐위하고 이성계를 조선의 국왕으로 옹립했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이 되어 체제와 관제를 정비했다.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국교로 삼아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신하들을 통괄하여 태평성대를 추구했다.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건축하여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정도전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세우고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라
전주시(全州市)는 을사늑약 직후 일제가 전주부성을 철거한 자리에 일본인 거주지가 형성됐다. 조선인들이 한옥촌을 짓기 시작하여 전주한옥마을을 형성했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한 경기전, 풍패지관, 풍남문, 전주향교, 전동성당 등 각종 문화재가 있다. 군산시(群山市)는 일제강점기 당시 호남평야에서 생산되는 쌀을 수탈하기 위해 성장한 항구 도시이다. 선유도는 고군산군도의 중심 섬으로 섬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신선이 놀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남원시(南原市)는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지리산과 대한민국 5대강 중 가장 깨끗한 섬진강을 사이에 있는 농촌 도시이다. 춘향가의 성춘향과 이몽룡이 만난 광한루가 있다. 진안군(鎭安郡)은 산의 모양이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붙여진 명승 제12호 마이산이 아름답다. 무주, 진안, 장수는 '호남의 지붕'으로 '무진장(茂鎭長)'이라 하며 가장 원시적인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고창군(高敞郡)은 동백꽃으로 유명한 천년고찰 선운사와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곳에서 자라는 풍천장어가 유명하다. 전통의 도시, 전주 한옥마을과 남원 광한루 부안군(扶安郡)은 난리가 미치지 않는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변산반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종자기(鍾子期)가 죽자 백아(伯牙)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행동하고,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을 위하여 단장합니다. 자신의 몸을 수양하는 것은 지혜의 표시이며,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짊의 실마리이며, 주고받는 것은 의리가 드러나는 바이며, 치욕을 당하면 용기로 결단하게 되며, 뜻을 세우는 것은 행동의 목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서백(西伯)은 백작으로 유리에 갇혔습니다. 이사(李斯)는 재상의 몸으로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당했습니다. 한신(韓信)은 왕의 신분이었지만 진(陳)이란 곳에서 붙잡혔습니다. 팽월(彭越)과 장오(張傲)도 한 때 왕 노릇을 하였으나 감옥에 갇혀 죄를 받았습니다. 강후(絳侯)는 여씨들을 타도하여 권력이 오패를 능가하였으나 청실(靑室)에 갇혔습니다. 위기후(魏其侯)는 대장의 몸으로 붉은 죄수복을 입고 목과 손발에는 쇠고랑이 채워졌습니다. 계포(季布)는 주가(朱家)의 집에서 목에 칼을 쓴 노예가 되었습니다. 관부(灌夫)는 거실(居室)에서 치욕을 당했습니다. 문왕(文王)은
신문에 안타까운 죽음을 접할 때 마다 착찹한 마음이 든다. 조그만 주의를 기울였으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더욱 그렇다. 광주시 연제동에서 발생한 모녀의 극단적 선택도 그렇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 이웃의 불상사라서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두 모녀가 남편의 상속 부채 3억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관리비 40만원, 장례비 800만원을 남긴채 고층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했다는 보도이다. 만약 그들이 남편 사망당시에 상속포기를 통해 부채를 떠 안지 않아도 되는 제도만 알았더라도, 상담을 통해서 파산선고를 통해 회생하는 절차가 있다는 것만 알았더라도 부채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사회안전망 제도는 기초생활수급자 중심 관리의 제도적 취약점으로 인해 과거 송파 세모녀 자살에서와 마찬가지로 수급자가 아니면 도움 요청할 방법이나 제도적 취약함으로 인해 생명의 포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안전망이란 '사회구성원들이 삶의 주기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위험들에 대하여 사회적으로 보호해 주는 제도적 장치'를 지칭한다. 삶의 주기에서 나타나는 위험들에 대처하는 사회안전망의 가장 큰 목적은 빈곤을 예방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1947년 11월 9일 경향신문에 처음으로 발표됐다. 소쩍새와 천동, 돌아온 여인과 무서리를 통해 오랜 방황을 끝내고 원숙한 인간이 되어 가는 진통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한국의 3대천재 시인, 미당 서정주 고창에서 태어나 미당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공부했고 광주학생운동으로 구속되어 퇴학까지 당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어 등단했고, 화사집, 귀촉도, 국화 옆에서, 미당 서정주 시선집 등 시집과 국화 옆에서, 귀촉도, 문둥이, 산사꽃, 선운사, 푸르른 날 등 수많은 시를 남겼다. 서정주는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의 3대천재 시인으로 불렀으나 서정주는 친일행위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오
전남 영암 구림마을과 전북 정읍 무성마을, 그리고 전남 나주 금안리를 호남의 3대 명촌이라고 한다. 구림마을은 왕인박사, 도선국사, 최경창 등이 태어났고 무성서원에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자 낙향한 정극인을 배향했다. 전남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는 금성산 자락이 마을을 좌청룡 우백호로 둘러싸고 있고, 멀리 영산강이 동네 앞으로 흘러간다. 희대의 변절자 신숙주가 태어난 곳이다. 변절자는 절개나 주의, 주장 따위를 바꾸거나 저버린 사람을 말한다. 신숙주의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변절의 상징인 숙주나물이 되었다. 세조가 죽음을 앞두고 세종, 문종, 단종을 변신한 신숙주에게 '당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신숙주' 라고 극찬했다. 변절자도 반역자에게는 영웅일 것이다. 1980년 민주화의 봄에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역에 모였다. 하지만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군부에 쿠데타의 빌미를 줄 수 있으므로 퇴각하자는 주장하여 서울역회군이 일어났다. 그리고 5.18 학살이 자행됐다. 심재철은 광주 출신으로 '김대중으로부터 20만원을 받아 시위에 사용했다' 라고 발언하여 김대중을 사형선고를 받게 하였다. 심재철은 변절하여 한나라당부터 미래통합당까지 5선 국회의
한 아름 가슴에 살포시 담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아주 큰 행복입니다. 봄이 오면 파릇 파릇 솟아나는 새싹에서~ 여름엔 푸르름과 뜨거운 햇빛~ 천사 같은 어린 친구가 햇님이 뜨거운 건 햇님이 너무 화가 났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가을엔 노랗게 노랗게 그리고 빨갛게 빨갛게 물드는 단풍잎들~~ 그리고 겨울엔 펑펑 내리는 함박눈속에서의 설레임~~ 작고 소소한 일상속에 특별함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 특별함을 절대 놓치지 않으며 잘 가꾸어 나갑니다. 우리 나라 말의 아름다움을 찾아 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보다 말하지 않아 더 빛나는 것이 '믿음' 입니다. 말 한마디 보다 더 큰 건 행동입니다. 수 없이 말은 하지만 행동은 말과 다르면 우리는 실망을 하게 됩니다. 실망을 하게 되면 믿음은 점점 사라지게 되며 사라진 믿음은 다시 회복하기 힘들기에 우리는 포기를 하게 됩니다. 좋은 것을 보는 것은 눈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환하게 미소짓는 것은 얼굴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며 사랑스런 말소리는 입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자신을 낮추어 인사하는 것은 몸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며 착한 마음씀은 마음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이렇
송시열(宋時烈)은 충청도 옥천 출신으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며 노론의 영수이다.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했고,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세자 시절의 스승으로 송자(宋子)라는 존칭을 받았다. 아버지인 송갑조와 김장생, 김집 부자에게 수학했다. 송시열은 성리학의 대가이자, 송자(宋子)라고 존칭 받은 대학자(문신, 성리학자, 철학자, 사상가, 정치인, 시인, 서예가, 교육자, 작가)로 당색은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학자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에 배향 되었고, 사후에는 신하로서의 최고 영예인 종묘에도 함께 종사 되었으니, 은진송씨는 6대 국반(國班) 중 하나이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직후 낙향하여 학문 연구에만 전념했다. 효종이 즉위하자 춘추대의에 근거하여 북벌을 위한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했다.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라는 주장으로 1차 예송논쟁에서 승리했고 2차 예송논쟁에서 패배했다. 송시열은 기사환국으로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어 제주도에 이배됐다. 국문을 받기 위해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정읍에서 사약을 받아 사망했다. 그의 후손 중 손자 주석(疇錫)은 숙종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