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헌(趙憲)은 경기도 김포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평안도 정주의 향교 교수로 재임하며 풍속을 일신했다.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등용을 청하는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조헌은 선조가 불공을 올리자 간언했고 정여립을 비난하다가 파면됐다. 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우고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요구하여 파면됐다. 왜군을 대비할 비책을 상소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서지방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조헌은 승병장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탈환했고 금산에서 7백 의사와 함께 전사하여 칠백의총(七百義塚)에 묻혔다. 현종 때 조헌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우저서원(牛渚書院)으로 사액됐다. 영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고종 때 문묘에 종사됐다. 송준길(宋浚吉)은 한성부에서 태어난 문신으로 이이를 사숙했다. 김장생, 김집 부자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예학(禮學)의 종장(宗匠)으로 김장생과 쌍벽을 이루었다.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하자 세손의 계승권을 주장하여 인조의 미움을 받았다. 송준길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집중하다가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가르치는 세자사부가 되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
"추석"은 가을 달빛이 가장 아름다운 저녁입니다. 소박하고 따뜻하며 사랑과 평화가 가득한 한가위 잘 보내셨죠^^ ‘행복이란 하늘이 파랗고 드높은 걸 발견하는 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라고 요슈타인 가이더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놓치기 쉬운 것들,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삶을 잠시 멈추고 숨 한 번 크게 쉬며 삶의 중요한 순간, 행복한 순간들의 풍경을 느끼며 담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한 발자욱! 한 발자욱! 나아갑니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남의 말을 하지 않으며 쉽게 화를 내지 않고 자신의 얘기를 전하기보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을 아는 사람이기에 행복을 가꾸는 일에 있어 금을 욕심내기보다 한권의 책을 더 가질 것이다’ 김영오님의 "행복을 아는 사람은" 중에 한 구절입니다. 빛의 천사 헬렌켈러는 자신에게 3일동안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첫째 날은 가르쳐 주신 설리반 선생님을 보고 산으로 올라 가 아름다운 꽃과 풀과 빛나는 노을을 보고, 둘쨋 날은 새벽 먼동이 트는 걸 보고 저녁엔 반짝거리는 밤 하늘의 별을 보며, 셋쨋 날은 아침 일찍 출근 하는 이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점심 땐 영화를 보며 저녁엔 화려한 네온싸인과 쇼윈도우의 상
인면수심(人面獸心)의 탈을 쓴 의원들을 기억하자! 이른 아침 원고를 마치고 송고할 즈음 이재명 대표의 구속 기각 소식이 보여 기쁜 소식을 먼저 전한다. 그렇지만 지난 일주일 간의 정가의 소용돌이를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어 글을 송고하기로 하였다.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 허물어져 간 가산을 일으켜 세우려고 몸부림치다가 쓰려졌다. 가장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 막되어 먹은 아들 하나가 입원 중인 아버지께 찾아왔다. 그 아들은 아버지께 재산의 일부를 떼어달라고 압박하면서 ‘내 몫을 주지 않으면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하겠다’ 고 압박을 한 사건이 진실이라면 이런 자(者)를 뭐라고 할까요? 이런 자(者)는 인면수심의 탈을 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위와 비슷한 일이 지난 9월 21일 국회 회의장에서 일부 민주당 의원들이 추태를 부린 사건과 유사하다. 그날은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 접수되어 본회의 의결을 실시한 날이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이낙연 후보가 ‘대장동 사건’의 의혹을 제기한 이후 검찰에서 사건을 인지하고 2년여 기간에 걸처 350여 차례의 압수수색을 벌였지만 아직까지 특별한 증거는 없다
영암군 곤이종면(昆二終面)은 일제 강점기에 서쪽의 영산강에 접하고 있다하여 서호면(西湖面)으로 개칭했다. 산골정은 가미카제를 뜻하는 신풍(神風)으로 변경하고, 장복골을 려몽연합군을 물리쳤다는 뜻으로 영풍(靈風)으로 변경하여 쌍풍리(雙豊里)라고 하였다. 산골정은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천서씨의 소호종가(蘇湖宗家)이다. 산골정은 큰 동네와 작은 동네로 나누어졌다. 작은 동네는 산골정에서 혼인을 하면 새로 살림을 내어주어 새로 생긴 터라는 뜻에서 새터마을이라 한다. 설날 아침이면 형제들끼리 모여서 큰집, 작은집 등 대소가(大小家)에 세배를 다닌다. 산골정은 모두가 친척이 되기 때문에 10촌 이상의 먼 집안은 다음날 세배를 다녔다. 당숙에게 세배 중에 다음 형제들이 들어오면 거기서 세배를 하기도 한다. 세배를 하면 점심 되기 전에 한잔 한잔 마시던 술에 취하기도 한다. 물론 음식을 잘하는 집에서만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다. 문산 댁은 회갑이 넘어서 집안 어르신에게 떡국을 끓여 세배하러 다니는 것을 마쳤다. 추석날은 성묘를 다녀와서 송편이나 광을 싸가지고 대박산에 올랐다. 대박산에 올라가면 월출산 천왕봉은 물론 유달산과 영산강이 한눈에 보인다. 대박산에는 호랑이
김장생(金長生)은 한성부에서 대사헌 김계휘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남은 임진왜란 당시 실종됐고 차남 김집은 문묘와 종묘에 동시에 종사된 6현 중 하나이며 삼남 김반은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의 종조부이자 구문몽의 저자인 김만중의 조부이다. 김장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송익필(宋翼弼),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도학과 예학을 수학하여 유학의 종장(宗匠)이요 예학(禮學)의 태두가 되었다. 김장생의 예학론은 노론 세력의 정치이념의 사상적 근간이 되었다. 김장생은 인조가 생부 정원군을 추존왕 추숭을 반대하여 갈등하게 되었다. 청백리에 녹선됐고 출사를 거부하고 김집, 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김육 등 후학을 양성했다. 숙종 때 문묘에 종사됐고 기사환국으로 문묘에서 출향됐고 갑술환국으로 종향됐다. 김집(金集)은 한성부에서 대사헌 김계휘의 손자이자 김장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송상현과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아버지 김장생으로부터 가학(家學)을 이었다. 산림의 천거로 대사헌에 임명됐으나 사임하고 경서 연구에 몰두했다. 김집은 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북벌론을 제창했고 이조판서가 되어 대동법을 반대했다. 소현세자 복권을 주도하다가 관직을 사퇴했다. 김
이이(李珥)는 강원도 강릉 오죽헌에서 사헌부감찰 이원수와 신사임당 사이에서 태어나서 경기도 파주에서 성장했다. 조광조를 사숙하고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9차례 과거시험에 모두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린다. 이이는 신사임당이 사망하자 아버지가 주모 출신인 권씨와 재혼하자 어머니 시묘살이를 마치고 금강산에 들어가서 승려가 되었다가 1년 만에 환속했다. 한때 승려의 경험인 동인과 남인의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이는 서경덕, 이황, 조식, 이언적, 백인걸 등을 비난하여 동인의 비난을 들었다.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자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을 주장했다. 동인의 영수 김효원과 서인의 영수 심의겸을 동시에 탄핵하여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다.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만 9번이나 임명됐고 대사헌, 대제학, 우찬성,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변법경장(變法更張)을 주장했다. 특히 병조판서로 재임하며 폐정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며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다.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으로 서인 소속의 정여립이 스승에게 실망하고 동인으로 전향하여 선조의 눈 밖에 났다. 정여립이 대동계(大同契)를 이끌고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 정여립과 연루된 1,
가을이 함께 하는 한가위가 며칠 후 다가옵니다. 올 가을에는 우리 이런 마음으로 가을을 아름드리 엮어 봅니다. 여름내내 어쩌면 우리가 살았고 살아가는 그리고 살아갈 지금을 모두 아름답게 여기고 앞으로 오는 미래의 지금을 곱디고운 행복의 꿈을 그려놓고 매일 매일 동그라미를 예쁘게 치며 살아가는 삶으로 감사함과 즐거움이 넘치게 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우리 모두와 나누며 아낌없이 베푼 너그러운 마음들이 기쁨이 되어 웃음으로 소리내어 여기저기 퍼지는 웃음소리가 영원의 소리가 되고 우리 모두가 함께 날마다 온맘을 다하여 하루하루 맞이 하며 가을을 아름드리 엮어 보냅니다. "내 힘들다"를 거꾸로 읽어보세요! "다들 힘내" ~~~ 생각이 바뀌면 세상도 바뀌고 우리도 바뀌어집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사람들과의 관계, 가족들, 그리고 지인들도... 이렇듯 어려운 일들도 많지만 우리 그 어려움도 함께 엮어서 씨실 날실로 곱디 곱게 우리의 인생을 엮어봅니다. 아주 예쁘게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오늘도 사랑하고 ♥ 행복하고 ♥ 건강 ♥ 하기를!
김인후(金麟厚)는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나서 10세 때 전라도관찰사 김안국에게 소학(小學)을 배워 김종직-김굉필-김안국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계승했다. 17세 때 면앙정에서 은거하던 송순, 18세 때 화순 동복으로 유배온 최산두 등에게 수학했다. 김인후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이황과 더불어 학문을 닦았다. 요직을 시작으로 세자사부가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자 현량과를 복원하고 기묘명현 신원을 강행했다. 인종이 사망하자 낙향하여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를 고수하고 벼슬을 거부했다. 김인후는 을사사화 이후 성리학 연구와 시문학 활동에 전념하며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 등에서 송순, 임억령, 정철, 기대승 등과 함께 호남 시단을 형성했다. 정조 때 전라도 출신으로 최초로 문묘에 종사됐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하고, 이항(李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에 반론하여, 이기(理氣)는 혼합(混合)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봉서원(露峯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하서전집》, 저서에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이황(李滉)은 경상도 안동부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21세에 초취 허씨와 결혼하여 27세에 상처했고 31세에 재취 권씨와 재혼하여 47세에 사별했다. 권주(權柱)는 경상감사로 재직 중 폐비윤씨에 사약을 전달한 죄목으로 교살됐고 부인은 관노가 되었다. 아들 권질(權礩)은 연산군을 비방하여 유배되어 중종반정으로 해배됐고 기묘사화로 유배됐다. 이황은 정신이 혼미한 권질의 딸과 재혼했다. 이황은 진사시와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김인후와 교유하며 성리학을 수학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고 을사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송나라의 주자의 문서인 주자대전을 연구하여 '동방의 주자'로 불렸다. 이황은 충청도 단양군수로 재직 중에 형 이해(李瀣)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겼다. 이해는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했고 무고사건에 연좌되어 귀양 도중 병사했다. 48세 이황은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18세 기녀 두향을 만나 낮 퇴계랑 밤 퇴계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두향은 풍기로 떠나는 이황
국회의원들은 국가가 위기에 빠졌는데 누구하나 현 정부의 폭주를 막아내려는 행동을 하지 않고 당 대표가 여당과 정부에게 과제를 주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하면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일부 수박계 의원들은 당 대표를 악마의 소굴로 몰아내려는 모의나 하고 있으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막돼먹은 놈들이나 할 수 있는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보고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들이 국민의 대표로서 세비를 받고 골목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니 더더욱 한스럽다. 특히 민주당 의원들은 국민들이 180여 석이나 몰아 줬는데 그 알량한 국회의장(박병석, 김진표)이나 선출하여 개혁적인 법안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더니, 이제는 현 정부에게 부역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니 이들은 선출한 국회의원들 모두가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원내대표의 선출도 마찬가지였다. 박원내 대표가 수박계라는 이야기가 떠돌아 항상 언제 돌출 행동을 할까 불안했었다. 당내 의원들도 박광온의 속성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를 원내 대표로 선출한 것은 거시적 안목보다는 자기들의 밥그릇에만 관심이 쏠려 선출한 결과였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일부 쪼잔 한 민주당 의원들 속에서 이
조광조(趙光祖)는 평안도 회천에서 종6품 찰방으로 재임하던 아버지 조원강(趙元綱)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온 김굉필(金宏弼)을 만났다.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에게 수학하여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조광조는 삼사의 언관으로 활동하며 소격서(昭格署) 폐지하고 현량과(賢良科) 실시하여 신진 사림파를 정계에 진출했다. 중종반정 공신들에 의해 폐출당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와 가짜 공신들의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주장하여 훈구파와 대립했다. 조광조는 왕도정치 실현을 주창하다가 훈구파가 조작한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야기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배되어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사사됐다. 명종 때 영의정에 추증됐고 광해군 때 종묘와 문묘에 동시에 종사됐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 : 주(走)+초(肖)를 합치면 ‘조(趙)’가 되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고 꿈꾼다는 뜻 ○절명시(絶命詩), 숨지기 전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최후 변론 愛君如愛父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였고) 憂國如憂家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이 하였네) 天日臨下土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昭昭照丹衷 (일편단심 내 충심을 더욱 밝게 비추네) 이언적(李彦迪
김굉필(金宏弼)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김종직의 제자이자 정여창의 동문이다. 유교의 수신서(修身書)인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소학동자(小學童子)를 자처했다.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김굉필은 제자 김굉필이 스승 김종직의 현실타협을 비판하여 결별했다. 김종직이 사망하자 김굉필이 사림파의 영수가 되어 수기(修己) 치인(治人)을 실천하며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을 계승했다. 김굉필은 연산군 때 조의제문을 빌미로 일어난 무오사화로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어 전라도 순천에 이배됐다 폐비윤씨 사건을 빌미로 일어난 갑자사화로 처형됐다 광해군 때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문묘에 종사됐다 정여창(鄭汝昌)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로 경상도 함양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정육을은 의주판관으로 재직 중 이시애 난으로 피살됐다.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됐으나 고사하고 김굉필과 함께 함양군수로 있던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다. 정여창은 예문관검열 세자시강원설서 안음현감 등을 역임했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됐다. 54세의 나이에 유배지 종성에서 사망하여 경상도 함양군 승안산 기슭에 묻혔다. 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