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일환의 역사야톡(12화) 공자(孔子)특집 9~10 공자특집9. 공자의 또 다른 제자 유자, 자장 공자는 노나라의 실력자인 계손씨 맹손씨와 불화로 13년 동안 천하를 주유했다. 공자가 천하주유 때 함께 했던 제자들을 공문십철이라 한다. 천하주유를 함께 하지 않은 증자(曾子) 유약(有若) 자장(子張) 등은 공문십철에서 제외됐다. 유약(有若)은 노나라 사람으로 자유(子有)를 말하고, 명나라 가정제가 유자(有子)라고 개칭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안자(안회), 증자(증삼), 유자(유약) 3인 만이 자(子)로 존칭되는 성인이다. 공자가 사망하자 자장(子張), 자유(子游), 자하(子夏) 등이 유자(有子)를 공자 대신 모시자고 주장하자 증자가 비판했다. 유자는 공자와 행실이 닮았고 백성으로 하여금 풍족한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고 생각한 인물이다. 자장(子張)은 진(陳)나라 사람으로 전손사(顓孫師)을 말한다. 공자가 행동이 지나치다고 평할 정도로 의욕이 넘쳤다. 배우는 데도 열의가 있었고, 위급한 것을 보면 생명을 내걸 정도로 의협심이 강했다. 전손사는 ‘아름다운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귀한 지위를 가졌어도 잘한다고 여기지 아니하며, 남을 업신여
서일환의 역사야톡(11화) 공자(孔子)특집 7~8 공자특집7. 공문십철의 염경, 염옹, 염구 <염백우/염경(冉耕)> 염백우(冉伯牛)는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백우(伯牛)이고 ‘염백우(冉伯牛)’ 혹은 ‘염자(冉子)’도 불린다. 염백우는 염옹(冉雍), 염구(冉求)와 형제이며 장남이다. 염씨 삼형제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공자의 격려를 받으며, 학문적으로 성공하여 공문십철이 되어 일문삼현(一門三賢)으로 불린다. 염백우(염경)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덕행(德行)으로 안연(안회), 민자건(민손), 중궁(염옹)과 더불어 유명했는데 사람됨이 단정하고 정의로워 공자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공자가 천하를 주유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했다. 염백우가 공자와 함께 노나라에 돌아와서 악질(惡疾)에 걸렸다. 그가 병을 앓을 때 병문안을 온 공자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그를 망쳤구나, 숙명이로다! 이런 사람이 몹쓸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몹쓸 병에 걸리다니.”라고 장탄식을 하며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공자보다 먼저 사망했다. <염옹/중궁) 중궁(仲弓)은 노나라 사람으로 염옹(冉雍)이라 한다. 공자의 제자이자 염백우의 동생이며 염구의 형이다.
서일환의 역사야톡(10) 공자(孔子)특집 5~6 공자특집5. 공자의 제자 ‘공문십철(孔門十哲)’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날 따르던 이들이 이제는 문하에 아무도 없구나. 덕행으로는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뛰어났고, 언변은 재아와 자공이 뛰어났고, 정사에는 염구와 계로가 뛰어났고,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가 뛰어났다”. 공자는 ‘덕행’은 안연(안회), 민자건(민손), 염백우(염경), 중궁(염웅)이, ‘언변’은 재아(재여), 자공(단목사)이, ‘정사’는 염구(자유), 계로(자로)가, ‘문학’은 자유(언언), 자하(복상)가 뛰어났다고 평가했다. 사마천은 사기에 공자의 제자들은 3천여 명에 달했으며, 그 중 예법, 음악, 궁술, 마술, 서예, 수학에 뛰어난 재사(才士) 70명을 '칠십자(七十子)'라고 칭했다. 공문십철(孔門十哲)은 칠십자 중에서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한 10인을 말한다. 논어 선진편에 공자의 제자는 먼저 나온 자로, 자공, 유약 등 '선진(先進)'과 뒤에 나온 안회, 증자, 자장 등 '후진(後進)'으로 구분했다. 공자를 비롯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오성(五聖)과 공문십철(孔門十哲)의 위패를 문묘에 모셨다. 공자가 사망하자 인(仁)과
서일환의 역사야톡(9) 공자(孔子)특집 3~4 공자특집3.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 자사(子思)는 노나라의 유학자로 공자의 손자이자 공리(孔鯉)의 외아들로 공급(孔伋)을 말한다. 증자의 제자이며 맹자의 스승이다. 공자는 아들 공리의 죽음을 시작으로 안회, 자로까지 죽음을 맞이하면서 크게 상심했다. 자사는 3세에 아버지 공리(孔鯉)가 사망하자 할아버지 공자의 손에 양육됐다. 공자가 사망하자 곡부를 떠나지 않고 공자 학단을 이끌던 증자의 제자가 되었다. 증자의 철학은 자사를 통해 맹자에게 이어졌다. 자사는 성(誠)과 중(中)을 기본으로 하는 공자의 말씀을 모은 중용(中庸)의 저자이다. 중용은 예기의 한 부분이나 송나라 때 주자가 중용을 논어, 맹자, 대학과 함께 사서(四書)에 포함했다. 주자는 성실함은 하늘의 도요, 성실해지려고 노력함은 사람의 도라고 하였다. 자사가 책을 집필한 이유는 '공자의 뜻이 후대에 가서 제대로 전해지지 않을까 걱정하여'라고 서술했다. 유교에서는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를 정통으로 간주한다. 자사는 위(衛)나라의 재상을 지내면서 ‘위나라를 살펴보니 이른바 임금은 임금답지 않고 신하는 신하답지 않다’라며 위나라를 경계했다. 위나
중소벤처뉴스 류권승 기자 | 특별초대석 발광보드 개발자 명범영 대표 특별인터뷰 경기도 동탄시에 위치한 발광보드 전시장을 찾았다. 이곳을 찾아 발광보드 개발자 명범영 대표를 만나 특별인터뷰를 구일암 발행인이 하였다. [특별초대석 발광보드 개발자 명범영 대표 특별인터뷰 영상] 전시장을 들어선 순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곳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분위기가 연출되었으며 우리의 생활 공간 및 사무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생각의 변화만 있으면, 얼마든지 에너지 절약 및 저 탄소를 실천 할 수 있는지를 느끼면 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경기도 동탄시 발광보드 전시장 1층 전경] 발광보드 개발자 명범영 대표는 20년 동안 빛을 연구했다고 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지금 ESG를 부르짖고 있지만 저는 20년 전부터 ESG 경영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20년 동안 에너지 절약 및 빛을 연구하면서 빛이라는 걸 왜 변화를 두려워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지금의 빛을 이용을 20%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빛이라는 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하나의 예를 들어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왜 사무실 및 생활 공간에 천장에 전구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인테리어 빛을
서일환의 역사야톡(8) 공자(孔子)특집 1~2 ●공자특집 1. 공자(孔子) 공자(孔子)는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현, 산둥성 지역) 출신으로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기원전 551년 숙량흘과 안징재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어머니 홀로 공자를 키웠다. 16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3년상을 지냈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禮)와 악(樂)을 정리하여 유학의 기초 경전을 정립하였으며, 이 예악(禮樂)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 실현을 목표로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실상 유학(儒學)의 창시자라 볼 수 있다. 노(魯)나라는 기원전 1046년 주나라를 건국한 무왕이 주공(周公)에게 내린 제후국으로 기원전 256년 초나라에 멸망했다. 주공은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이 동생으로 형인 무왕과 조카인 성왕을 보좌했다. 주공은 주례(周禮)와 의례(儀禮)를 저술했다. 공자는 주공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고,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해서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노력했다.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 수도의 시장격)를 지냈는데 잘 다스렸다. 이에 노나라 정공(定公)의 신임을 얻어 지금의 법무부장관격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의 벼
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7화 ◆ 사 신 - 좌청룡 · 우백호 · 전주작 · 후현무 ◆ 사신(四神)은 사령(四靈) 또는 사수(四獸) 라고도 지칭하며 동아시아에서 각 방위를 상징하는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전주작(前朱雀) 후현무(後玄武)를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 편에 앞(남쪽)에는 주작, 뒤(북쪽)에는 현무, 왼쪽(동쪽)에는 청룡, 오른쪽(서쪽)에는 백호가 있다고 사신(四神)을 설명했다. 방위신(方位神)인 사신은 사방의 수호신으로서 군사적으로는 부대의 깃발, 포진에도 응용되었다. 그리고 좌청룡 · 우백호 · 전주작 · 후현무로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적용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고대부터 고분의 내부, 건축물, 동경(銅鏡), 동전(銅錢) 등 방위의 의미를 지닌 특정 공간이나 기물에 사신을 장식하는 일이 유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되는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 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고구려 고분벽화로 요동성총(遼東城塚) 등 4∼5세기 고분에서부터 사신도가 등장한다. 또 천장화의 일상(日像)과 월상(月像), 별자리 그림에서도 사신의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 청룡(靑龍)은 동방
이낙연은 自省이 먼저다! 광주는 민주주의 성지, 정의의 도시, 평화의 도시, 인권의 도시라고 부르기도 하여 이곳에 사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 상 수 칼럼리스트] 그런데 이 고장 출신인 이낙연 대표의 행보를 보면 동향인으로서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가 그동안 지역민이나 국민들께 큰 기여는 하지 못했을 지라도 마음 한 구석에는 지역과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해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경선의 뒤처리를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낙연 인간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공인으로서 활동을 한 국회의원시절, 전라남도 도지사 시절과 국무총리 시절, 그리고 민주당 당대표 시절 그가 무엇을 이뤄낸 일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뒷마무리를 어떻게 해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서는 대부분 기존 신문에 게재된 자료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형식을 유지하려고 한다. 먼저 이낙연은 국회의원 시절(2000.04.07~2014.05.15)에는 특별한 업적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이낙연은 2004년 노무현대통령 탄핵안이 나왔을 때 노무현대통령 탄핵을 찬성했을까? 반대했을까? 관심이 있었다. 2004년 3월 12일 탄핵안에 가결에 찬성했나 반대했냐
덩샤오핑과 흑묘백묘론 대약진운동은 마오쩌둥(毛澤東)이 근대적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추진한 경제성장 정책이다. 마오쩌둥은 인간의 노동력으로 농업과 공업이 발전될 수 있다며, 인민공사를 창설하고 철강사업과 같은 노동력 집중산업을 독려하는 대중적 경제부흥운동을 추진하였다. 대약진이라는 말은 <인민일보>의 1957년 11월 13일자 사론인 '전민을 발동하여 40조 강요를 토론하고 농업생산의 새로운 고조를 일으키자.'에서 비롯되었다. 이와 같은 구호 아래 중국 내부적으로 7년에 영국을, 8년 혹은 10년 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공업생산의 지표를 높였다. 그 결과 급격한 공업노동력 수요로 농촌에서 과도한 인력을 강제로 착출하였고, 이로 인하여 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필수품의 공급부족이 일어났으며 노동력을 잃은 농촌의 농업생산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농업경제의 파탄을 가져왔다. 이로 인한 농업생산량의 부족에 연이은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과 구 소련과의 관계악화로 인한 경제원조 중단의 계속으로 인하여 수천만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악재들이 산재한 가운데 기술 개발을 병행하지 않고 노동력 집중만으로 과다
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 5화 ◆일제침략1 운요호 사건은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됐다 . '강화도 조약'은 1876년 2월 27일 조선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조일수호조규, 병자수호조약 등으로 불린다. 제1차 한일협약 (한일협정서)는 1904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로 고문정치가 시작됐다.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라고 한다. 제2차 한일협약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 17일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일한보호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여 사실상 식민지가 되었다. 을사늑약, 일한보호협약, 한일협상조약 등으로 불린다. 제3차 한일협약 (정미늑약)은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순종이 즉위했고 군대가 해산되고 차관정치가 시작됐다. 정미협약, 2
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 4화 ◆유학특집8. 서주의 유왕과 동주의 평왕 주나라 2대 주성왕과 3대 주강왕의 통치하던 40년을 성강의치(成康之治)로 불린다 10대 주여왕은 탐욕스러워 간신 영공을 등용하여 폭정을 자행했다.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주여왕이 도망가서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정사를 대신했다. 10대 주여왕이 도망갈 때부터 11대 주선왕이 즉위할 때까지 주공과 소공이 정무를 맡아보던 14년을 공화(共和)라고 한다. 11대 주선왕이 주공과 소공의 보좌를 받아 국세가 중흥해 선왕중흥(宣王中興)으로 불린다. 12대 주유왕은 정실인 신후(申后)가 태자 의구(宜臼)를 낳았고 후궁인 포사(褒姒)가 백복(伯服)을 낳았다. 주유왕은 포사를 총애하여 태자 의구를 폐위하고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주유왕은 웃지 않은 포사를 웃기려고 비단을 찢고 거짓 봉화를 올렸다. 기원전 771년 견융족이 주나라를 침입하여 주유왕 백복 포사 등을 살해됐고 수도 호경(鎬京)이 폐허가 되어 주나라도 멸망했다. 제후들이 낙읍(洛邑)에서 폐태자 의구를 주평왕으로 옹립하여 주나라를 재건했다. 주나라는 서쪽 호경(鎬京)이 수도일 때를 서주(西周)라고 하고 동쪽 낙읍(洛邑)이 수도를 때를 동주
서일환 박사의 역사야톡 - 3화 ◆유학특집5. 주나라 초대 무왕 주무왕(周武王)은 주나라를 건국한 1대 군주로 이름은 희발(姬發)이다 아버지는 주문왕 희창(姬昌)이고 어머니는 하나라 출신 태사이다. 주무왕은 백읍 고(伯邑 考)의 동생이자 주공 단(周公 旦)의 형이다. 주문왕 희창(姬昌)은 주왕(紂王)을 알현하고 선정을 베풀기를 요구하다가 유폐됐다 장남 백읍고는 유폐된 아버지를 구하려다가 오히려 주왕에 의해 능지처참을 당했고 시체는 고기전병(肉餠)으로 만들어져 주문왕 희창에게 보내졌다.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은 형 백읍 고(伯邑 考)가 살해되자 형을 대신하여 주무왕으로 즉위했다. 주문왕 희창(姬昌)은 아들 주무왕에게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주무왕은 강태공을 재상으로 기용하고 맹진에서 제후 800여 명을 규합하여 은나라를 공격했다 은나라의 주왕은 궁궐을 불태우고 자결했다. 주무왕은 역성혁명으로 즉위 2년 만에 사망하자 아들 주성왕(周成王) 희송(姬誦)이 즉위했다. 주무왕이 사망하고 주성왕이 즉위하여 무왕의 동생 주공 단이 섭정하자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이 관숙(管叔) 희선(姬鮮) 채숙(蔡叔) 곽숙(霍叔) 등과 더불어 삼감(三監)의 난(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