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애국지사) 순국열사 홍범식과 의열단 김시현 순국열사 홍범식 홍범식(洪範植)은 정2품 이조판서를 역임한 홍우길의 손자이며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홍승목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를 시작으로 내부주사와 혜민서참서를 역임했다. 태인군수로 재직 중에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의병 보호책을 펼쳤다. 1907년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불평등 조약인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했다. 한일신협약은 정미 7늑약(丁未 七勒約), 3차 한일협약(三次 韓日協約) 이라 부른다.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했다. 일제는 특사 파견을 빌미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대한제국 군인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인영과 허위를 중심으로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했다. 일제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 소탕 작전을 자행했다.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송조 6현과 해동18현 송조 6현 조광윤이 카이펑을 도읍으로 송나라를 건국하여 당나라가 멸망 이후 화남의 5개 왕조와 화북의 10개 정권이 난립하던 5대10국 시대의 혼란을 통일했다. 송나라는 요나라, 금나라, 서하의 침략을 받았고 원나라에 의해서 멸망했다. 송나라는 여진족 금나라가 침략하자 휘종이 아들 흠종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영토할양과 배상금 지급 등 협상을 진행했다, 송나라의 흠종의 굴욕적인 협상에 주전론(主戰論) 자들이 반발하자 금나라가 총공세를 펼쳤다. 송나라는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태상황 휘종과 황제 흠종을 포로로 끌려가는 정강의 변(靖康之變)을 당했다. 태상황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자 황제 흠종의 동생인 조구(趙構)가 임안(臨安)에서 송나라를 재건했다. 송나라는 카이펑이 수도일 때를 북송(北宋)이라 하고 임안이 수도일 때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송조6현(宋朝六賢)은 중국 송나라 때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 주희 등 6인의 유학자를 지칭한다. 주돈이(周敦頤)는 북송의 유학자로 기존의 유교를 도가의 자연주의 사상, 불교의 심성철학과 융합하여 도학(道學)을 정립했다. 복건성(福建省)에서 정호와 정이 형제의 스승이 되었다. 연꽃을 찬사하는
문묘종사와 유교(儒敎) 문묘(文廟) 종사(從事) 신라 31대 신문왕은 나당전쟁으로 피폐해진 혼란을 정비하고 고등교육 기관인 국학(國學)을 설치했다.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孔子) 공문10철 72제자의 화상(畫像)을 국학에 안치했다. 김수충은 신라의 33대 성덕왕의 아들로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 자격으로 당나라에 파견되어 3년 동안 머물면서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유학을 수학했다. 당현종이 김수충을 총애하여 조당(朝堂)에서 연회까지 베풀어 주었다.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은 고구려의 태학(太學)과 신라의 국학(國學)을 계승한 고등교육 기관이다. 충렬왕 때 원나라의 간섭으로 국학으로 개칭됐다. 충선왕 때 성균감(成均監)에 이어 성균관(成均館)으로 격상했다. 조선이 건국되자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하고 성균관도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졌다. 성균관은 생원시 진사시 등 소과에 합격한 생도들이 입학하여 대과를 준비했다. 성균관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양성하여 왕조체제 유지에 기여했다. 문묘(文廟)는 문묘(文廟)란 글월 문(文)과 사당 묘(廟)라는 의미이며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다. 문선왕묘(文宣王廟)의 약칭으로 공자묘(孔子廟)라고도 부른다 중앙에
신숙주, 배신자와 킹메이커 사이에서 극단적인 평가 받아 범웅 ‘신숙주’는 전남 나주 노안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초시와 복시에 장원을 하였고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에서 벼슬을 시작했다. 평소에 책읽기를 좋아하여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세종이 지나가다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다고 전한다. 신숙주는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 위구르어, 아랍어, 오키나아어, 이두 등 8개 국어에 능통하여 왜국에 서장관으로 다녀왔다.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자에 앞장섰고 훈민정음 해례본을 편찬했다.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등에게 왕세자 ‘문종’과 왕세손 ‘단종’의 앞날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했다. 신숙주는 문종이 즉위하자 양녕대군을 탄핵했고, 직제학과 부제학이 되었고 세종실록을 편찬했다.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측근이 되었다. 나주출신 신숙주, 8개 국어에 능통했고 6명 임금을 섬겼고 4번 공신에 책록 문종이 요절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김종서와 황보 인이 권력을 독점했다. 정인지, 성삼문, 신수주 등 집현전 학자들이 수양대군과 결합하여 공격하자 김종서와 황보 인은 안평대군과 연계하여 대응했다
몽골 특집9~10. 몽골공화국과 내몽골자치구 몽골 특집9. 몽골공화국 1206년 칭기스칸이 몽골제국을 건설했고 1271년 쿠발라이칸이 원나라를 건설하여 남송을 정복하여 최초로 이민족이 대륙을 통일하고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1368년 명나라에 의해 몽골고원으로 쫓겨났다 청나라에 의해 내몽골과 외몽골로 분열됐다. 1911년 신해혁명 직후 1차 혁명을 일으켜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나 중화민국이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1921년 러시아혁명 직후 2차 혁명을 일으켜서 중화민국으로부터 독립했다.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을 수립하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1991년 민주화 혁명을 일으켜서 복수정당제를 채택하고 계획경제 체제를 폐기하고 시장경제 정책을 도입했다. 몽골은 동아시아의 내륙국으로 면적은 세계 18위로 남한의 15배이며 인구는 340만 명으로 부산과 비슷하며 세계에서 인구밀도 가장 낮다 공용어는 몽골어이며 키릴문자를 사용한다. 몽골은 중국 자치구인 내몽골과 몽골국인 외몽골로 구분한다. 외몽골의 동쪽은 헹티산맥, 서쪽은 알타이산맥, 남쪽은 고비사막, 북쪽은 타이가 슾지이다. 몽골인 중에서 외몽골보다 내몽골에서 사는 인구가 많다. 옵
몽골 특집7. 원나라의 쇠퇴 북원(北元)은 1368년 몽골제국 17대 황제이자 원나라 13대 황제이며 북원의 초대 황제인 혜종이 명나라 주원장에게 쫓겨나서 만리장성 북쪽의 몽골초원에서 재건한 나라이다. 혜종은 오이라트에 살해됐고 기황후는 행방은 알 수 없다. 북원의 2대 소종은 원나라 14대 황제이며 혜종과 기황후의 아들이다. 소종은 명나라군의 다시 외몽골로 쫓겨났다 기황후는 고려인 공녀로 혜종의 궁녀에서 황후가 되어 소종을 낳았다. 북원의 3대 평제는 원나라 15대 황제이며 혜종의 아들이자 소종의 이복동생으로 1635년 조리그투칸과 오이라트에 살해됐다. 북원의 장수들이 명나라에 투항하여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원나라가 몽골초원으로 쫓기 나자 조리그투칸이 몽골제국 18대 대칸으로 즉위하여 국호 대원(大元)을 폐지했다. 몽골제국 마지막 황제인 39대 링단칸이 티베트로 가려던 중 급사했다. 1634년 황족들이 청나라 홍타이지에게 항복하여 멸망했다. 모굴리스탄칸국은 1347년 차가타이칸국에서 독립하여 1706년까지 중앙아시아 동부에 성립된 몽골계 국가이다. 모굴인이 중심이 되어 모굴칸국이라 한다. 오이라트 출신의 인류 역사 최후의 유목제국인 준가르에 멸망했다. 오
몽골 특집5~6. 몽골제국의 분열과 원나라 몽골 특집5. 몽골제국의 분열 차가타이칸국은 1226년 칭기즈칸이 둘째 아들 차가타이가 칭기즈칸으로부터 중앙아시아 지역을 분봉 받아 수립됐다. 4대 몽케칸이 사망하자 아리크부케에 반기를 들고 오고타이칸국과 대립했다. 카이두가 원나라와 연합하여 오고타이칸국을 정복했다. 10대 두아칸이 오고타이칸국을 정복했다. 차가타이칸국은 유목민과 정주민의 분열로 동차가타이칸국과 서차가타이칸국으로 양분됐다. 서차가타이칸국을 티무르왕조가 장악했다. 티무르왕조가 멸망하자 모굴리스탄칸국이 계승했다. 오고타이칸국은 칭기즈칸이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칭기즈칸으로부터 서몽골 지역을 분봉 받아 수립됐다. 초대 오고타이칸을 대신하여 오고타이칸의 황후가 섭정했다. 2대 귀위크칸을 대신하여 황후가 섭정했다. 3대 카이두는 오고타이의 손자로 1271년부터 실질적인 통치자였다. 아리크부케의 계승자를 선언하며 원나라 쿠빌라이칸과 내전을 벌였다. 6대 차파르칸은 차가타이칸국과 교전에서 패배하고 원나라로 망명했다. 킵차크칸국은 칭기즈칸이 첫째 아들 주치의 아들인 바투가 오고타이칸이 사망하자 남러시아에서 수립했다 바투칸이 몽케칸을 추대한 공로로 자치권을 승인받았다
몽골 특집3. 칭기즈칸 카마그몽골족의 에수게이는 메르키트족의 후엘룬을 약탈하여 결혼했다 몽골족과 메르키트족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에수게이는 타타르족의 장수 테무친 우게를 죽이고 아들의 이름을 테무친이라 하였다. 에수게이는 타타르족에 의해 독살됐다. 메르키트족은 에수게이가 후엘룬을 약탈한 것에 대한 복수로 테무친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했다. 테무친은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케레이트족 부족장을 찾아가서 결혼동맹을 맺고 메르키트족에 공격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다. 테무친은 케레이트족의 의형제 자무카와 함께 메르키트족을 공격하여 임신한 상태의 아내 보르테를 구출했다. 세력을 형성한 테무친은 몽골족으로부터 칸으로 추대됐다. 의형제 자무카가 시기를 느끼고 테무친에게 공격했다. 테무친이 배신자 자무카를 공격하자 나이만족에게 도망갔다. 테무친은 여진족 금나라를 등에 업고 몽골족을 핍박하던 타타르족을 정벌하고 자무카가 도망간 나이만족을 정벌했다. 테무친은 몽골을 통일하고 대몽골제국의 칭기즈칸으로 즉위했다. 에스게이와 첫 번째 부인 소치겔 사이에 벡테르, 벨구테이를 낳았고 두 번째 부인 호엘룬 사이에 보르테, 테무친, 카사르, 하지운을 낳았다. 칭기즈칸과 보르테 사이에 1남 주치
몽골 특집1~2. 몽골초원과 몽골제국 몽골 특집1. 몽골초원 동아시아인(East Asian)은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몽골인 등이 있다. 몽골인은 몽골 공화국을 중심으로 중국의 내몽골 자치구와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러시아의 칼미크 공화국과 부랴티야 공화국 등에 거주하는 몽골계 민족이다. 몽골초원에는 동호족이 수렵과 농경을 하며 거주했다. 몽골제국이 등장하기 전에는 흉노족의 흉노제국, 선비족의 유연 북위 수나라 당나라, 돌궐족의 돌궐제국, 위구르족의 위구르제국,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등이 차례로 패권을 장악했다. 몽골고원은 시계 방향으로 야블로노비산맥, 다싱안링산맥, 난산산맥, 알타이산맥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이다. 몽골고원은 풀이 자라지 않아 인류가 살지 않는 고비사막과 기원전 1,000년경부터 유목민 부족이 거주하던 초원지대로 구성됐다. 몽골초원에서 12세기까지 유목 생활을 하는 카마그몽골부족, 메르키트부족, 타타르부족, 케레이트부족, 나이만부족 등 5부족이 거주했다. 카마그몽골부족의 테무친은 몽골고원을 기반으로 유목 생활을 하던 4개 부족을 정복하고 몽골제국을 건국했다. 카마그몽골부족은 동호족의 갈래인 몽올실위로부터 유래했다. 카마그몽골부족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 두목, 이상은 당나라의 시인3. 백거이 호는 향사거산(香士居山), 이칭, 백낙천(白樂天) 장한가(長恨歌) / 백거이(白居易) 칠월칠석에 장생전에서 밤 깊어 사람 없자 은밀히 속삭였던 말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리라 하늘과 땅도 끝이 있고 시간조차 다함이 있으나 이 한만은 영원히 이어져 끝이 없으리. 양귀비(楊貴妃)는 쓰촨성 촉주현에서 하급 관리의 4녀로 태어나서 당현종 이융기의 아들인 수왕 이모(壽王 李瑁)와 혼인하여 시아버지 당현종의 첩이 되었다. 수왕 이모는 부인 양귀비를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승려가 되었다. 양옥환은 22세였고 당현종은 57세였다. 양귀비의 오빠는 양소는 당현종으로부터 양국충을 하사받고 승상이 되었다. 양국충에 위기감을 느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현종은 장안을 버리고 도망갔고 양귀비는 자결했다. 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한무제와 이부인의 고사를 인용하여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은 서사시이다. 장한가를 파사하는 선비가 많아 낙양의 종잇값을 폭등시킨 원인이 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장한가의 시작은 양귀비가 당현종의 사랑을 받다가 안사의 난으로 자결하는 장면, 중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당나라의 시인1. 이백 이백(李白) 은 자가 태백(太白)이고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이다. 이백은 정치적 큰 이상을 갖고 있었으나 꿈이었을 뿐 끝내 이룰 수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크게 기뻐하며 장안으로 향하였던 그였으나, 실망한 나머지 장안을 떠나 두루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명산대천을 빠짐없이 찾았다. 그리고 자연을 통하여 체득한 진리를 시로 표현하였다. 망여산폭포를 예로 든다. 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 / 이백(李白) 日照香爐生紫烟, 遙看瀑布掛前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향로봉에 햇살 들어 불그레 안개 피어나는데 멀리 바라 보니 어허 폭포가 앞 내에 걸려 있네 날아 흘러 곧바로 삼천 척을 떨어지니 구만리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졌나? 루산(廬山)은 중국 장시성 주장시와 난창시 있는 명산으로 최고봉은 한양봉(汉阳峰)으로 해발 1,474m이다. 1년 365일 중 200일 이상 운무에 둘러싸여 있으며, 국가중점 풍경명승구와 세계문화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루산은 사마천이 입산하여 사기를 집필했고, 동진의 왕희지가 별장을 짓고 기거했고, 혜원(慧遠)이 정토종을 개창했고, 도연명이 입산하여 시조를 남겼다. 백거이, 이
우리 민족의 전쟁 3~4화 우리 민족의 전쟁3. 고구려와 당나라의 여-당 전쟁 고구려-당나라 전쟁은 645년에서 668년까지 벌어진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이다. 수문제 양견이 건국한 수나라는 수양제 양광의 폭정과 여-수 전쟁으로 인해 멸망을 자초하여 당고조 이연이 수공제 양유로부터 양위를 받아 당나라를 건국했다. 고구려 영류왕은 당나라에 호의적인 태도로 전쟁을 방지했다. 당태종 이세민이 즉위하여 고구려 침략을 준비했다.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고 강경정책을 펼쳤다. 여-수 전쟁이 끝난 지 30년 만에 여-당 전쟁이 시작됐다. 1차 여-당 전쟁은 645년 당태종 이세민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개모성, 백암성, 현도성, 비사성, 요동성 등을 차례로 함락했다. 고구려 양만춘은 안시성에서 당태종을 막아냈다. 결국 당태종은 후퇴하고 647년과 648년에 소규모 공격을 하였다. 2차 여-당 전쟁은 660년부터 662년까지 당고종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평양을 직접 공격했다. 백제 부흥군은 왜국으로부터 지원받아 나당 연합군의 후미를 공격하자 당나라군은 퇴각했다. 3차 여-당 전쟁은 666년부터 668년까지 당고종이 평양성을